시인 김현승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출처 : 시집 '가을의 기도' 미래사(1991)

▲흔히 '기도는 호흡이다'라고 말들 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이에 대해 덴마크의 종교사상가인 키에르케고르가 한 논술은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호흡을 한다는 것이며, 가능성과 자기의 관계는 산소와 호흡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인간이 산소만 또는 질소만을 호흡할 수 없는 것처럼, 기도라는 호흡도 역시 가능성만 또는 필연성만을 활용할 수는 없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신, 자기(정신),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죽음에 이르는 병') 계속해서 그는 “자기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감동되어 일체가 가능함을 깨달은 정신의 사람만이 신과의 관계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신의 의지가 인간에게 실현 가능성이 있음으로써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기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감동되는 때'란 언제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시에서처럼 온전히 절망하는 인생의 ‘가을’ '낙엽들이 지는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는 가능성의 때가 아닐까. 그제야 비로소 그는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유한하지만 '비옥한 시간' 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영혼은 순간의 절망을 떨치고 영원성을 향해 끊임없이 상승하게 된다. 신 앞의 단독자로서 우뚝 선 시인이 고도의 정신력으로 짧은 세 연 속에 응축해 놓은 유한성과 무한성, 육체와 영혼, 성속(聖俗)의 향방에 고루 옷깃을 여미게 된다.

■김현승(金顯承)
△1913년 평양 출생, 1919년 전남 광주로 이주, 1975년 영면.
△호는 다형(茶兄)
△평양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문과 수료.
△1934년 '동아일보'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발표로 등단.
△1946년 숭일학교 초대 교감, 조선대 문리과 대학 부교수, 전북대 대학원 및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 강사, 숭실대 문리대학장 역임.
△1953년 계간지 '신문학' 창간 주재.
△한국문학가협회 상임위원,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및 부이사장, 기독교문화협회 위원장 및 크리스찬문학회 회장 역임.
△한국시인협회 제1회 시인상 수상 거부, 제1회 전라남도 문화상, 1973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시집 : '김현승시초詩抄' '옹호자의 노래' '견고한 고독' '절대 고독' '김현승시전집' '마지막 지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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