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길 속에 길이 있다<1>

저자 : 남인희

경남 진주 출신으로 경남고,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금오공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때 홍익대에서 강의했다. 1977년 기술고시에 합격해 건설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건설교통부의 교통시설국장, 건설기술심의관, 원주지방국토관리청장,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 도로국장, 육상교통국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건술교통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마지막 기획관리실장, 최초의 정책홍보관리실장, 마지막 차관보를 역임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홍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 등을 받았으며, 2005년 SOC기반시설본부장, 2006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을 역임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힐 때, 사람들은 이렇게 기원한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 이제 길을 찾게 해달라', '나의 길을 열어달라'고. 이럴 때의 길은 물론 철학적, 은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길이 앞으로 가야 할 곳에 대한 지향성과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길은 뻗어 있는 공간이다.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연결로다. 실제로 길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 이루어졌으며 문명과 문물의 교류가 이어져 왔다. 세계를 지배한 민족의 공통점을 찾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일찍이 이 길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막대한 비용과 땀을 쏟아 길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혈관을 통해 몸 구석구석까지 피를 보내야만 건강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처럼 사방으로 뚫려 있는 길은 후미진 외딴 곳까지도 닿을 수 있게 해주는, 이를테면 우리 생활의 혈관이라 할 수 있다.

길 하면 곧 '도로'라는 개념이 떠오르지만 범위를 넓혀서 생각해 보면 도로만이 길이 아니다. 배가 오가는 바닷길이며, 물이 흐르는 하천, 기차가 다니는 철로,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하늘길도 길이다. 그럼에도 길 하면 도로를 연상하게 되는 건 가장 오래된 형태의 길일 뿐더러 가장 폭 넓게 이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도로의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보자. 도로의 역할에는 크게 두 가지 기능, 사회적 기능과 경제적인 기능이 있다. 길을 통해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고 균형발전을 이루는 것이 사회적인 기능이요, 물자와 사람의 수송을 보다 빠르고 쉽게 함으로써 비용과 시간의 절감효과를 거두는 게 이른바 경제적인 기능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한 달도 더 걸렸던 거리가 길이 생기면서붙너는 사나흘, 나아가 좀 더 빠른 고속도로가 건설된 후엔 단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게 됐으니 무협지에서나 읽어보았음직한 축지법이 현실로 가능하게 된 셈이다.

도로의 이 같은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우친 대표적인 민족은 로마인이었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라 퐁텐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남길 정도로 말이다. 그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고대 로마는 기원전 3세기부터 전 세계를 연결하는 방대한 도로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2세기까지 500년 동안 건설한 도로의 규모가 장장 15만km에 달했단, 입이 딱 벌어질 일이다. 아피아 가도를 시작으로 도로건설에 박차를 가한 로마는 식민지를 포함해 전 영토에걸쳐 도로를 놓았다. 이 같은 도로는 로마제국의 심장이엌ㅆ다.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라는 말이 나올 만큼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확장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사방으로 펼쳐진 이 도로망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도로의 중요성을 인식한 시기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지리적으로 이민족들의 침입이 용이한 위치에 있다 보니 도로를 만들어봐야 외부세력의 침투경로로 악용될 뿐이라는 부정적인 생각도 도로가 발달하지 못한 큰 원인이 되었다.

19세기까지도 도로사정이 열악했던 우리의 현실을 개탕하며 도로의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거론한 이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었다. 청나라나 일본의 선진문물을 보고 들은 이들은 우리나라도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려면 우선 도로다운 도로를 만들어야한다고 강조하고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또 조선 말기에 도로의 개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실제 치도론(治道論)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개화파 학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었다. 개화에 대한 그의 의지와 확신은 1882년, 일본을 다녀온 후 더욱 확고해졌다. 산업개발에 관한 김옥균의 이론은 매우 정연하고도 타당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산업을 개발해야 하고 산업을 개발하려면 도로를놓고 제대로 관리하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도로가산업발달에 가장 중요한 인프라라는 걸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으로 있던 박영효는 이런 그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1883년 치도기구를 설립했다. 또 정보는 해마다 5만원을 도로개수비로 쓰기로 결정했다.

김곡균의 도로관은 당시 개화파의 대변지인 『한성순보』에게제한 치도약론(治道略論)이란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위생과 농림과 치도라고 지적했다.

또 치도를 잘 한다면 농업생산물의 운반이 편리하며 열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해낼 수 있으므로 나머지 아홉사람은 다른 산업에 취업하게 됨으로써 국가의 이익과 백성들의 부강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로가 가져올 경제적 효과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하고, 또 확신하고 있었다.

1897년 『독립신문』도 전국의 미개한 육로교통을 한탄하며 도로개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국중(國中)의 도로는 인체의 혈맥과 같으니라. 고로 혈맥이 웅폐하고는 장수하는 자가 없고 도로가 협소하여 험난하여서는 잘 되는 나라가 없나니, 아국(我國)의 금일 잔악한 형세는 상하로 정이 불통함이니라.

정이 불통함은 도로가 협잔함이라. 비록 500년 국도(國道)에서 불과 10리 되는 오강(五江:마포, 서강, 용강, 용산, 광나루) 길도 험하고 추하고 협소하야 거마의 왕래가 불편하나니 한강을10리 지척에 두고 있는 도성의 길조차 이처럼 험하야 무역과 왕래를 방해하니 참으로 한심하도다"

인간의 3요소를 예전에는 '의식주'라고 정의했는데, 요즘은 갈 행(行)자를 더해 '의식주행'이라고들 한다. '행'이란 교통이요, 교통은 곧 '길'이다. 위에서 예시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길이 우리 일상생활의 필수요소로 진화하기까지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미 기원전 3세기에 길을 닦은 로마제국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로가 곧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에 대해 좀더 일찍 눈을 떳더라면 우리의 역사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역사에 관한 한 전제나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안타까움에 다시 한 번 그 어리석음을 범해볼 따름이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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