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는 쥐불처럼
엄한정



쭉정이씨는 바람에 날리고
보리는 쥐불처럼 겨울을 산다.

햇살이 아직은 뿌리에 닿지 않지만
심화로 불탄 재에
뿌리 내리며
아리고 쓰린 일 다스려 안고
신명에 눈뜨고 있다.
노인의 아들인 듯 늦되는 곡식.

그들이 등걸잠을 잘 때에
은혜의 이슬은
벗은 발을 덥히고
가려운 가슴을 적신다.

거울에 비추지 않는 봄을
남모르게 모으며
별 얼고 돌 우는 밤에
진실을 이간하는 대목을 지운다.

썩지 않는 말씀을 고르다가
하류로 풀리는 풀씨처럼
들판을 덮고
이윽고 보리는 농부의 잠 속에 꿈이 된다.


■출처 : 시집 '풍경을 흔드는 바람' 새미(2015)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한흑구 수필가는 보리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거니와 사실은 보리로 상징되는 과거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에 대한 예찬이 아니었겠는가. 지금은 살만한 때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한겨울 한파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어내는 보리의 모습에서 우리는 여전히 배울 게 많은 것 같다. 이 시에서 시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보리’를 ‘쥐불’에 비유한다. 그 번지는 모습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쥐와 해충의 알을 죽이고 봄 새싹의 거름이 되며, 정신적으로는 잡귀를 쫓고 신성한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닌 쥐불과 보리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존재의 의의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거울에 비추지 않는 봄을/ 남모르게 모으며/ 별 얼고 돌 우는 밤에/ 진실을 이간하는 대목을 지운다.”는 4연과, 5연의 “썩지 않는 말씀”과 “농부의 잠 속에 꿈이 된다.”는 구절에 이르면 우리는 시인이 보리에 부여한 의미를 눈치 채게 된다. 역경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이윽고’ 스스로 희망이 되는 존재. “노인의 아들인 듯 늦되는 곡식”인 우리에겐 아직 그의 교훈이 필요하다.

■엄한정(嚴漢晶, 호는 오하(梧下) · 염소(念少))
△1936년 인천 부평구 출생.
△서라벌 예술대학 및 성균관 대학교 졸업.
△1963년 '아동문학'에 동시 추천으로 등단, 1973년 '현대문학'에 '조춘 4수(早春 四首)' 추천.
△국민훈장석류장, 한국현대시인상, 성균문학상, 일봉문학상, 한국농민문학상, 제5회 한송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감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한국농민문학회 회장, 미당시맥회 회장, 한국문인산악회 회장, 한국문인수석회 회장 역임.
△이한세상 동인, 교직 40년 경력.

△시집 : '낮은 자리' '풀이 되어 산다는 것' '머슴새' '꽃잎에 섬이 가리운다' '면산담화(面山談話)' '풍경을 흔드는 바람'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