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남조

나그네


김남조




내가 성냥 그어
낙엽더미에 불 붙였더니
꿈속의 모닥불 같았다
나그네 한 사람이
먼 곳에서 다가와
입고 온 추위를 옷 벗고 앉으니
두 배로 밝고 따뜻했다

할 말 없고
손잡을 일도 없고
아까운 불길
눈 녹듯 사윈다 해도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내가 불 피웠고
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
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
내 마음 충만하고
영광스럽기까지 하다

이대로 한평생인들
좋을 일이었다.


■출처 : 시집『충만한 사랑』, 열화당(2017)


▲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보살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이 말은 그저 옛이야기가 되고, 세상은 자기애가 지나친 사람들의 비정한 소식들로 흉흉하다. 그래서일까? “내가 불 피웠고 / 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 / 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 / 내 마음 충만하고 / 영광스럽기까지 하다”는 시구가 ‘모닥불’인 양 훈훈하게 마음을 덥혀준다. 우리의 존재는 언젠가 지고 말 ‘낙엽더미’와 같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지만, 목숨의 불꽃이란 “꿈속의 모닥불”처럼 아름답지만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아까운 불길”에 불 쬐는 사람이 없다면 그 얼마나 쓸쓸하고 허무한 일인가. 더구나 그것이 사위어가는 불길임에랴. 누군가 나의 불을 쬐면서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기쁨은 배가 되고 마음이 충만해져 “이대로 한평생인들 / 좋을 일”이 된다. 그럴 때 ‘나그네’는 톨스토이의 이야기 속 천사 미하일이 될 테니….


■김남조(金南祚)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수星宿' '잔상'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이화고녀 교사, 숙명여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제1회 자유문학가협회 문학상, 제2회 오월문예상, 제7회 한국시인협회상, 제33회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제3회 삼일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제41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만해대상, 2017년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 '목숨' '나아드의 향유(香油)' '나무와 바람' '정염(情念)의 기(旗)' '풍림(楓林)의 음악(音樂)' '겨울바다' '설일(雪日)' '사랑 초서(草書)' '동행(同行)' '빛과 고요' '바람 세례' '외롭거든 사랑이소서' '희망학습' '사랑초서와 촛불' '영혼과 가슴' '귀중한 오늘' '심장이 아프다' '충만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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