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원불교 전 문인협회장.
불교 선종(禪宗)에서 조사(祖師)가 수행자를 인도하기 위해 제시하는 과제와 그에 대한 수행자의 대답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선문답(禪問答)이라고 합니다. 한 때 저 역시 깨달음의 길에 이르기 위해 선 수행(禪修行)에 심취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내놓은 책이 저의 졸저(拙著) ‘청한심성(淸寒心醒)’이지요.

그 ‘청한심성’이라는 책은 옛 조사(祖師)들의 어록(語錄)과 선문답을 집대성한 ‘벽암록(碧巖錄)’을 우리 원불교적 입장에서 서술한 책입니다. 선문답이라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몇날 며칠 아니 몇 년 동안 공부를 해도 선 수행을 통하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어쩌면 고도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선수행의 폐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 ‘덕산재(德山齋)’에 30년간 토굴에 들어가 선 수행을 통해 한 소식 하셨다는 스님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30년간의 청춘을 불사른 이 분의 정열에 경의와 찬탄을 보내기에 앞서 걱정부터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고해(苦海)에서 허우적대는 중생은 어찌하라고 그 아까운 청춘을 토굴에서 허송한 세월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지요.

스승에게 깨침을 점검 받는 선종의 간화선(看話禪)은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해서 깨침을 얻는 수행방법입니다. 그런데 수행자가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기준은 사실상 객관적으로 없습니다. 어떤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형식이나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 선(禪)의 가르침은 곧
‘참 나’를 가리키는 ‘나침반’

특히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기본 종지로 하기 때문에 더욱 이러한 것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깨침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기 때문에 선종에서는 깨달음의 인가(認可)를 중하게 여깁니다.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공부, 즉 화두를 타파했는지를 검증 받는 것이지요.

혼자서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가의 방식은 주로 스승과 제자의 문답(問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깨침(法)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법 거량(法擧量)’이라고 합니다. 이 법 거량을 통해 스승이 제자의 깨침이나 화두 타파를 인정해 주면, 인가를 받는 것입니다.

법 거량은 스승과 제자가 마주 보며 1대 1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 앞에서 법사(法師)와 참가자가 문답을 통해 확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답으로 진행되는 법 거량의 질문은 어떤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되며, 질문에 답이 막혀서도 안 됩니다. 화두를 타파했다면 모든 의심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답 또한 정확하고 막힘이 없어야 하지요.

예를 들어 저 유명한 화두 가운데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이라는 꽃을 활짝 피우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개념에 빠지지 말라(不立文字)! 그대 자신을 곧장 돌아보라(直指人心)! 이 두 가지 가르침이야말로 달마가 중국에 전한 최고의 심법(心法)이 아닐런지요? 그러니까 누구나 이 심법을 터득하면 조사도 되고 보살도 되며 부처도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의 선문답이 모두 ‘참 나’를 가리키는 ‘나침반’들입니다. 각각의 선문답에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선사들이 전하는 살아 숨쉬는 ‘선의 지혜’가 선문답입니다. 자신이 선문답의 주인공이 돼, 각각의 선문답에서 전하는 ‘선’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곧장 자신의 내면에 빛나는 ‘참나’를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계에서는 지나치게 화두선(話頭禪)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체의 불교적 명상법들이 모두 동일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모두 하나의 근본적 원리에 의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계는 이를 지나치게 구분하면서 화두 선만이 최고라고 고집하고 있지는 것은 아닐까요?

■ 지나친 ‘화두선’에 대한 집착은
‘불성’ 이르는 길 가로막을지도

부처님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을 각성하고 밝혀내신 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참선법은 내면의 순수한 불성을 되찾게 하는데 그 참된 의미를 지닙니다. 지나친 ‘화두선’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불성’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문답으로 ‘참나’를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 ‘본래무아’라는 말은 ‘나’ 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참나’ ‘진아’ ‘불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하근기 중생으로써 진리, 도, 깨달음에 바탕을 둔 진실 된 지식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원불교에선 1천500개가 넘는 이 많은 화두를 다 수행할 것이 아니라 ‘의두요목(疑頭要目)’ 20개 조목을 참구케 해 깨달음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의두(疑頭)’라는 것은 불교의 ‘화두’나 ‘공안(公案)’이나 같은 말입니다. 본래 화두나 공안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에 이른 선사나 조사들이 늘어남에 따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 많은 화두나 공안을 어느 세월에 다 수행을 하겠습니까?

‘의두’란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며 과거 불조(佛祖)의 화두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해 감정을 얻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불교도 ‘시대화(時代化) 대중화(大衆化) 생활화(生活化)’가 된 새로운 불교가 도래한 것입니다.

큰 도는 원융(圓融)해 유(有)와 무(無)가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며,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닙니다. 또한 동(動)과 정(靜)도 둘이 아니지요. 이와 같이 큰 도는 서로 통해 간격이 없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견성(見性)을 하려는 것은 성품(性品)의 본래자리를 알아 원만한 부처를 이루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견성만 하고 성불(成佛)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 아니한다면 화두가 무슨 소용이며 깨달음은 어디다 쓰겠는지요. 선문답의 비밀은 30년간의 토굴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견성 연후에 제중(濟衆)하는 데에 청춘을 불사르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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