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길 속에 길이 있다<4>

  남들이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도로건설에 관한 한 피해의식에 가까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던 게 우리의 현실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국토건설에 관해 선각자적인 혜안을 가졌던 이들도 없진 않았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이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이다.

  정약용은 18년이란 긴 귀양생활을 통해 모두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대표적인것이 『목민심서 (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다.  『목민심서』는 지방의 부패한 관리들의 실상을 고발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나갈 것을 일깨우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관리의 참된 도리와 책무를 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을 보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고 그들이 근심 걱정 없이 잘살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바로 정치라는 다산의 철학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목민심서』가 백성에 대한 관리의 도리를 담은 책이라면 『경세유표』는 정부기구의 제도적 개혁론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제목을 해석해 보면 '신하가 감히 죽음을 각오하고 진언한다'는 뜻이다. 일종의 비장감마저 느껴진다.

어디 제목만 그러한가. 정약용은 참으로 거리낌없이 정부의 행정에 대해 예리한 비판과 함께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조세행정을 이런 방법으로 바꾸라든가, 중앙의 행정기구를 이렇게 개편하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가운데는 국토정책이나 도시계획에 관한 진언들도 상당히 눈에 띈다. 실로 실학계의 거목다운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이다.

실제로 정약용은 건축이나 설계에 관한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강(노량진)에 배다리를 놓는 방법을 고안하였는데, 노량진에 설치된 배다리는 정조의 화성 행차를 위한 것이었다.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당파싸움에 휘말려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무덤을 양주의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불렀다.

이후 정조는 이곳에 수시로 들렀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강을 건너는 일이 무엇보다 큰일이었다. 이때 정약용이 낸 아이디어가 노량진에 수십척의 배를 얽어매놓고 그 위에 나무판을 깔아 다리 역할을 하게 만드는, 이른바 '부교공법'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이 배다리의 가설을 반대하는 신하가 많았다. 일단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데다 갑자기 물이 불어날 위험도 있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서였다.

이때 정약용은 안전하면서도 경비를 절감하는 방안을 강구하여 반대파를 설득했다. 정약용이 설계한 이 배다리공법이야말로 기술 혁신의 모범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당시 배다리를 지나 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장면은 <주교도(舟橋圖)>라는 그림으로 남아있는데 지금도 워커힐호텔에 가면 그 방대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정약용의 또 다른 공적 가운데 하나는 화성 축조에 근대적인 공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현륭원'을 중심으로 화성을 축성하기로 하고 200명의 학자에게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늘날로 치면 공모제도와 같다고 볼 수 있으니, 정조는 국정 운영방법에서도 열린 행정을 실천하는 깨인 임금이었다. 이렇게 해서 학자들의 아이디어를 모아서 검토한 정조는 정약용이 낸 아이디어를 가장 맘에 들어하며 그에게 축성의 대임을 맡기게 된다.

'화성성역(華城城役)'이라 부른 이 대역사는 1794년 2월에 기공, 1796년 9월에 완공했다. 성의 총연장은 5,743m였고 성내의 시가지는 34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성역은 우리 역사상 도성을 빼고는 최초의 신도시, 계획도시라는 큰 의미가 있다.

또한 화성 신도시는 우리 건설사에서 특기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우리 건축사상 최초로 벽돌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돌로 성을 쌓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화성의 경우는 69만 5,000장이나 되는 벽돌을 구워 성벽을 쌓아나갔다.

또 다른 하나는 '거중기'라는 새로운 기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큰돌이나 목재를 사람이 옮기지 않고 오늘날의 크레인과 비슷한 원리인 움직도르래를 사용해 올림으로써 공사를 손쉬운 방법으로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거중기는 정약용이 직접 설계해서 만든 것으로 좌우에서 장정 15명이 7.2톤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하니, 한사람이 240kg의 무게를 들어올린 셈이다.

또 한가지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것은 공사과정에서 실명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나라에 큰일이나 행사가 있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적은 기록을 '의궤(儀軌)'라고 한다.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보면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재료의 가공방법, 공사일지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동원된 인력의 이름을 포함한 인적사항과 임금까지 적혀있다.

이를테면 '성의 어느 부분은 몇 월 몇 일, 어디에 사는 아무개가 공사를 했고, 그 품삯으로 얼마를 받았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실명제는 개개인에게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게 하여 공사의 품질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 전반에 실명제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미 오래전에도 이런 실명제가 시행됐다니 마음 뿌듯한 한편, 그런 훌륭한 전통을 꾸준히 이어받지 못한 게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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