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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칼럼] 4선 대통령 이승만의 무염지욕 <無厭之慾>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하, 이승만)을 미국의 國父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동일선상에 놓고 국부로 추앙하자는 주장과 단체가 있는데, 내키지 않는다. 국부로 추앙받기 위해서는 초대 대통령이라는 타이틀 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에 상응하는 업적과 행함이 뒷받침돼야 한다.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한 헌신을 부정하진 않지만, 돌아보기조차 부끄러운 부당한 방법으로 4번이나 대통령에 오르고, 임기 중 하야의 길을 걸은 대통령이기에 그에 대한 국부논의는 적절치 않다.

■ ‘전대미문’ 개헌·선거…장기집권 획책

이승만은 1948년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돼 4년간 직을 수행했는데, 이승만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국회의 다수를 형성하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승만의 ‘국회’에서의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대통령을 직선으로 선출하는 헌법개정을 추진했고 성공했다(제1차 개정). 헌법개정은 6·25사변으로 인한 부산 피난시절에 이뤄졌는데, 전쟁 중, 그것도 국토의 일부만 남은 상황에서 달리는 말의 기수를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십분 활용했다. 무염지욕의 시작이다. 1952년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됐다.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이 국회의원선거에서 과반을 점하게 되자, 자유당은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에게 1차 중임만 허락하고 있었기에,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걸림돌을 제거해야했기 때문이다.

1954년 11월,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헌법개정안에 대해 국회에서 표결이 행해졌는데, 국회표결 결과는 통과에 필요한 136표에 한 표 부족한 135표였다. 재적의원 203인의 3분의 2 이상은 ‘135.33’으로 136표의 찬성이 필요했는데, 한 표 부족했기에 투표 당일 부결이 선포됐다. 그러나 이틀 뒤 다시 국회에 모여 수학의 4사5입 이론으로 이틀 전의 부결선포를 취소하고 가결을 선포했다(제2차 개정). 제2차 개정을 사사오입개헌이라고 하는 이유는, 203의 3분의 2는 사사오입이론에 의하면 135이므로, 135표로도 가결될 수 있다는 전대미문의 해괴망측한 논리로 개헌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무염지욕의 점입가경이다.

미국 독립의 전쟁영웅인 워싱턴 대통령은 당시 미국 헌법에 의하면 연임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대통령직을 두 번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미국의 모든 대통령은 워싱턴의 전례에 따라 1차 중임에 그쳤다. 다만 미국 32대 F.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4번 당선됐는데, 실질적으로는 3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루즈벨트가 임기 시작 3개월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에서 4번 당선되고 3선으로 마친 대통령은 이승만과 루즈벨트뿐이다. 이후 미국은 대통령의 장기집권의 폐해를 우려해서 1차 중임으로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했다. 할 수 없는데 하려고 한 이승만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워싱턴을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1956년 이승만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자신의 러닝메이트인 이기붕이 부통령에 낙선했다. 이에 자유당과 정부는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정을 획책하며 이기붕을 계획대로 부통령에 당선시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3․15 부정선거다. 세 사람, 다섯 사람씩 짝을 지어 투표소에 들어간 뒤 서로 확인을 받게 하는 3인조·5인조 투표, 다른 후보에 찍은 표 뭉치 앞뒤에 여당후보의 표를 씌운 후 모두 여당후보의 표로 집계하는 부정개표, 득표수가 너무 많아 득표수를 하향조정하는 등 읽어도 들어도 믿기 어려운 전대미문의 부정선거였다. 3.15 부정선거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에 대한 발포명령의 책임자로 사형에 처해졌다.

■ 일각 ‘국부추앙’ 주장은 어불성설

선거는 행정영역에 속하는데, 우리나라는 선거를 행정에서 분리해 독립된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관장하게 하고 있다. 이는 매우 드문 입법례로, 3.15 부정선거에 연유한다.

이승만은 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제3대 선거), 조병옥(제4대 선거)이 선거 전에 급사함으로써 두 번 다 쉽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야당의 유력한 경쟁후보가 선거 전에 사망하다니 그것도 두 번씩이나, 이런 경우 하늘이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야당 대통령후보의 연이은 죽음은 정권교체를 염원하던 국민들에게 커다란 실망과 좌절을 안겨줬다. 3․15부정선거는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무염지욕이란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심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북한을 무염지욕의 적군으로 표현한 바 있다. 말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했고, 무염지욕의 결과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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