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출처 : '우리들의 양식', 민음사(1974)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인디언들처럼 봄이 올 때까지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봄’이라고 하는 희망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봄은 또한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을 잃었을 때에도 온다.” 역설 같지만 우리 안에는 성숙과 성장 발달의 경향성이 있으며, 그것은 의식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우리의 무의식 안에 은총처럼 자리하고 있어서 언제나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에도 거스를 수 없는 의지가 있듯 개인과 사회의 성장에는 성장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며 영적 안내자인 스캇 펙은 “삶을 통해 우리가 정신적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오로지 문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위중한 상태인데도 성장하려는 의지가 강한데, 이럴 때는 빨리 치유된다. 그러나 반대로 정신질환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경미한 증상의 환자이면서도 성장하려는 의지가 결여된 사람은 진전이 너무 더디다”('아직도 가야 할 길')라고 보고한 적이 있다. 겨울이 아무리 춥고 길었어도 봄이 오듯이 개인과 사회가 아무리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마침내 올 것이 오게” 되어 있는 게 세상의 이치일 것이다. 하지만 ‘봄’이 오려면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의 행동이 매개되어야 하듯이 우리 역시 고통스럽더라도 무언가를 행동해야 한다. 시인의 행동은 시를 쓰는 것이다. 시인은 봄이 ‘뻘밭’이나 ‘물웅덩이’ 같은 문제들을 직시하고 ‘한눈 팔고’ ‘싸움도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기도 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그런 다음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던, 그래서 절망하고 있던 진실을 쉬운 말로 새삼 조용히 일깨우며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눈부신 봄은 “먼 데서 이기도 돌아온 사람”이다.

■이성부(李盛夫)
△1942년 전라남도 광주 출생, 2012년 영면.
△광주고등학교,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5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바람' 당선, 1962년 '현대문학' 3회 추천 완료,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우리들의 양식' 당선.
△'태광' '순문학' 동인, 김현승 시인 사사.
△한국일보 편집부국장, 일간스포츠 문화부 부국장, 뿌리깊은나무 편집 주간 역임.
△제15회 현대문학상, 제4회 한국문학작가상, 제9회 대산문학상, 제1회 가천환경문학상, 제18회 공초문학상, 제24회 경희문학상 수상.
△시집 :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산 뒤에 두고' '야간산행' '지리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도둑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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