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길 속에 길이 있다<8>

전쟁을 위한 도로 못지않게 활발하게 닦인 길은 교역로였다. 처음엔 자급자족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점차 부족하거나 구할 수 없는 생필품을 얻기 위한 물물교환이 활발해지면서 과거의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이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교역로가 발달하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교역로는 기원전 2500년경에 만들어진 엠버길로, 고대 로마가건설되기 이전 이탈리아인이었던 에트루리아인과 고대 그리스 상인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지중해의 일부인 엠버 해안을 연결하는 이 도로는 교역로였을 뿐 아니라 당시 이 해안에 모여 있던 여러 국가의 영토를 구분하는 역할도 함께했다.

교역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길로는 '실크로드(비단길)'를 꼽을 수 있다. 중국 장안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거쳐 고대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장장 7,000km의 길이다.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 붙였다. 중국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유럽과 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 비단이었다는 점에 착안해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이라고 명명하였고 이것을 영어로 '실크로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원래 중국의 서쪽 끝은 험준한 산맥들이 솟아 있는 그야말로 죽음의 불모지였다. 『서유기』에 나타난 요괴들 역시 중국인들이 이 지역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이다. 험한 산맥들이 솟아 있는 이 죽음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동양인들과 서양인들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그저 상상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이 지역을 넘나드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통행한 길은 대략 세 갈래로 갈라진다. 누란을 거쳐 타클라마칸사막 남쪽의 니야와호탄 등을 지나 카슈가르에 이르는 서역남로 천산산맥을 기준으로 남쪽 코스인 하미에서 우루무치를 거쳐 알마타로 이어지는 천산북로(서역북로라고도 함), 둔황과 투루판과 쿠처를 거쳐 아커쑤를 지나 카슈가르에 이르는 천산남로다.

『서유기』의 주인공인 삼정법사는 서역남로를 지나며 『대당서역기』를 썻고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의 고승 혜초는 천산남로를 넘어 인도에 이르렀다. 또 베네치아인인 마르코 폴로도 이코스를 따라 원의 수도인 베이징에 다다랐다.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와 서역지방을 두루 여행했던 혜초는 고향을 생각하며 시 한 수를 읊기도 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뜬구름 너울너울 그곳으로 돌아가네

구름에 실어 편지라도 부치려는데

바람이 거세어 돌아보지도 않네

길 위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마음이 와닿는 시이다. 지금이야 편안한 여행길이 열렸지만 당시만 해도 이 여정은 7,8년은 족히 걸리는 고행길이었다.

어쨌든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세계에 도착한 이들이 전하는 모험담을 듣고, 또 몸에 걸친 의복을 보고 서방의 부인들은 동쪽에서 만들어진 신비한 옷감인 비단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비단을 구하기 위한 길에 올랐다.

  이 교역은 처음에는 중국의 농민과 북방 유목민 간의 물물교환으로 시작하여 점차 범위가 확대됐다. 기원전 4~3세기부터는 상인들이 릴레이 식으로 교역하는 동서교역의 통로가 되었고, 처음엔 생활필수품에서 점차 사치품으로 교역의 물품도 다양해 졌다. 중국의 비단도 이 길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상인들이 분주히 오갔을 그 길을 지금 다시 따라가 보자. 우선 베이징에서 열차를 타고 14시간을 달리면 닿는 곳이 서안이다. 이곳은 그 옜날 동서 양쪽의 문물이 모여들었던 세계적인 제국 당나라의 수도요, 서역로로 향하는 제1관문이기도 했다.

타고난 미모를 스스로도 감출 수 없었던 양귀비가 놀던 화청지도 이곳에 있다. 양귀비의 시아버지였던 현종이 그녀를 열여덟번째 아들에게서 빼앗아 여산 화청지 온천으로 끌어들이면서 양귀비도, 현종도, 당도 쇠락의 운명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1974년 3월, 서안에서는 또 하나의 '사건'이 중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 농부가 대지 위에 곡괭이를 내려찍는 순간, 흙으로 빚은 사람의 머리와 부딪쳤고 이는 기록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진시황릉 발굴의 서곡이 됐다. 훗날 많은 도굴꾼들이 극형에 처해지면서 '사람 대가리 흙 대가리만 못하다'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이 서안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돈황이라는 곳에 이르면 거대한 모래산인 명사산이 나그네를 맞아준다. 규모만도 동서로 40km, 남북 20km라지만 눈앞의 산은 도무지 크기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한가운데는 반달형 오아시스 월아천이 또렷하다.

돈황을 떠나 기차로 꼬박 하루를 달리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 투루판에 닿는다. 이곳은 한족이 아니라 아랍인들처럼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쌍커플과 흰 피부를 가진 위구르족이 살고 있는 자치구다. 양귀비가 서역 출신이라는 말이 있듯 이곳의 여인들은 미색이 뛰어나다.

이곳은 물로 뒤덮인, 사해 다음으로 낮은 땅으로 가장 낮은 곳은 해발 154m라고 한다 여름이면 한낮 평균기온이 45도요, 지표온도는 무려 80도나 된다고 한다. '밀가루를 반죽해 벽에 붙이면 빵이 되고 달걀을 찬 물에 집어넣으면 삶은 달걀이 되는, 화기가 필요없는 땅'이다.

투루판을 떠나 다시 기차를 타면 쿠처에 이른다. 투루판에서 카슈가르까지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 놓인 길이 천산남로다. '타클라마칸'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땅이란 뜻, 곧 죽음의 땅을 의미했다. 그런데 험준한 산과 죽음의 사막 사이의 천산남로는 로마제국과 당나라를 동서로 잇는 가장 번화한 길이었다.

쿠처는 투루판에서 기차로 꼬박 열세 시간을 달려야닿을 수 있다. 중국의 역사책은 쿠처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궁의 화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하며 집들은 장려하다." 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는 "군대가 대대적으로 집결된 곳이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황톳길과 길 위로 피어오르는 먼지가 황량함만 안겨줄 뿐이다.

마침내 카슈가르에 닿으면 슬픈 운명의 여인 향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죽은 후에도 몸에서 그윽한 향기가 풍겨났다 해서 '향비'라 불리는 여인, 그녀는 22살에 이곳을 침략해온 청나라 장수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끌려갔다.

귀족출신이었던 향비는 칼을 빼어들어 건륭 황제의 손길을 물리치고 구중궁궐 자금성에 갇혀 살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건륭제 옆에 묻힌 것을 후손들이 꽃상여에 싣고 카슈가르로 옮겨 지금은 이곳 사람들에게 성녀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국제도시의 면모를 간직하고있는 카슈가르는 파미르 고원을 넘으면 초원이나 인도로 갈 수 있고 서역의 천산남로로도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경제와 군사의 요충지였다.

카슈가르에서 열차와 작별을 하고 비행기로 우루무치에 닿으면 광대한초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구절양장 산길을 올라 닿은 천지는 우리에게 또 다른 감회로 와닿는 곳이다. 미모와 절대권력과 초능력을 겸비한 중국전설의 여인 서왕모가 살았던 곤륜산이 이곳이라 한다. 백두산을 닮은, 그리고 천지를 닮은 자연이 낯설지 않은 곳, 바로 이곳에서 실크로드의 여정은 끝을 맺는다.

이 비단길의 전성기는 중국이 정치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성세를 누렸던 당나라 시대다. 강력한 정권은 변방의 안정을 가져왔고 자유로운 교역환경이 조성돼 교역로의 시점이자 종착점인 장안은 세계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이 비단길을 통해 이루어진 교역상품은 비단만이 아니였다. 보석이나 옥, 직물 등도 오갔다. 뿐만 아니다. 천산남로를 통해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고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그리고 로마에서는 이단시되었던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네스토리우스파도 이 길을 통해 중국으로 전해졌으니 '비단길'은 '종교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물건이든, 종교든, 그것이 서로 통하려면 거기엔 길이 필요했고 새로운 세상은 결국 그 길을 개척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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