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천양희

원근(遠近)리 길


천양희




가깝고도 먼 것이 무엇이었더라. 원근리에 머무는 마음이여. 길 한 쪽이 나를 당긴다. 꼬불꼬불한 것은 길만이 아니다 내 속의 산맥들 그리고 능선들. 원근리는 몰래 나를 알고 있어서 마음의 명암까지 뭉클해진다. 삶은 꼬리 잡혀 꿈쩍 않는데 하늘 한끝에서 별똥별이 떨어진다 포기한 자 이탈한 자 그들이 자유롭다 문득 느낀다. 내 그림자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지도 않는 생나무 그늘이 발끝까지 따라온다. 나는 촘촘한 생의 생잎들을 조금씩 들춘다. 들추다가 지름길을 힐끗 엿본다. 재봉새 한 마리 언제 끝날지 모를 집을 짓는다. 빠른 길만이 앞선 것은 아니다. 오늘도 길은 가까웠다 멀었다 했다. 저물녘에서야 마음의 경계 너머 다른 길에 멈춘다. 언제나 바짝 엎드린 기찻길. 우린 아무것도 일치할 수 없다. 세상 속을 가로질러 길끝과 마음끝이 나란히 선다. 가깝고도 먼 것이 무엇이었더라. 소리치며 기차가 지나간다. 날마다 내 속으로 들어온 길. 원근리에 가서 꺼내놓는다.

■출처 : '마음의 수수밭', 창비시선(1994)

▲시인은 ‘원근리’라는 길 이름의 대립적 이원성에 착안해 거기에 자기 존재의 이원성을 겹친다. ‘가깝고도 먼 것’, 그것은 어쩌면 시인의 마음과 닮아있다. 나아가 그 생김새를 살펴보니 ‘꼬불꼬불한 것’ ‘산맥들’과 ‘능선들’로 이어진 게 자신의 내면과 너무도 유사하다. 사실 그것들은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모순과 대립, 복잡성, 갈등 요인들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시인은 “몰래 나를 알고 있어서 마음의 명암까지 뭉클해지는” ‘원근리’에 머물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삶과 마음을 살펴보며 화해를 도모하고 있다. 일찍이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무의식의 작용을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들은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한다.”고 갈파했다. 또한 그는 무의식이란 ‘창조의 원천’이며, 그 안에 있는 ‘그림자’는 우리가 감추고 싶은 ‘열등한 인격’이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수용할 때 좀 더 관대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도 했다. 운명에 ‘꼬리 잡혀’ 답답해하던 시인은 하늘을 본다. ‘별똥별’이 떨어진다. 별똥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시인은 “포기한 자 이탈한 자 그들이 자유롭다”고 문득 느낀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와 “생각지도 않는” ‘그늘’에도 불구하고, “촘촘한 생의 생잎들” 안에서 ‘지름길’을 “힐끗 엿보았기” 때문이다. 노상 우리 삶의 길은 “가까웠다 멀었다” 하면서 “저물녘에야 마음의 경계 너머 다른 길에 멈추는” 것, 결코 “일치할 수 없는” ‘기찻길’처럼 “나란히 서서” 가야만 하는 것, 바로 ‘원근리 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빠른 길만이 앞선 것은 아니다.” 거기엔 “언제 끝날지 모를 집을 짓는” ‘재봉새’와 같이 ‘느린 지름길’의 미학을 펼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천양희(千良姬)

△1942년 부산광역시 출생.
△1965년 '현대문학'에 '정원 한때' '화음' '아침'으로 등단.
△경남여자고등학교, 이화여대 국문학과 졸업.
△기독교시단 동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제10회 소월시문학상, 제43회 현대문학상, 제13회 공초문학상, 제37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제2회 박두진문학상, 제26회 만해문학상, 제8회 이육사문학상 수상.

△시집 :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독신녀에게'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낙타여 낙타여' '오래된 골목'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벌새가 사는 법' '새벽에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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