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해졌다가 쇠약해지는 땅의 기운의 사이클
재물의 흐름 읽는 풍수학적 코드 점검 필요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이란 땅의 기운이 왕성해졌다가는 쇠약해지는 사이클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땅을 유기체로 여겨 다른 생물들과 같이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겪게 된다는 논리다.

지기쇠왕설을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이라고도 한다. 지기쇠왕설이란 도읍의 지기와 관련하여 국운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기쇠왕설이 호기심을 얻고 있는 것은 아무리 명당이라고 해도 영원성을 지니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명당이라고 결론이 난 곳에 도읍을 건설하였어도 왕권은 영원하지 않았으며, 조상의 유골을 모시고 집을 짓고 살아도 부귀영화가 영원하지 않았다는 경험적 결과가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기가 쇠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도 쇠퇴하여지므로 왕성한 곳을 찾아서 옮겨 살고자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생각의 흐름이다.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최대의 사건

신채호 선생께서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고 칭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묘청의 난, 1135-1136)은 지기쇠왕설이 역사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고려시대의 풍수지리학은 왕권을 구심점으로 성행했다. 나라의 모든 권력과 재물과 경제가 왕권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왕 이외에 지기쇠왕설로 국가에 영향을 끼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40년전인 고려 숙종(재위 1095-1105) 때 김위제가 한양에 남경을 도읍으로 건설하면 주변 국가들이 조공을 바친다 하여 남경건도를 시행했다.

고려시대 서경천도론을 기치로 한 묘청의 난은 개경중심의 문벌귀족과 지방출신의 신흥세력간의 충돌이었다. 수도천도론이 지기쇠왕설을 근거로 주장되지만, 천도론이 힘을 얻는 때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여 새로운 수도가 필요할 때이고, 둘째는 인심의 흉흉함과 왕권의 약화, 기득권세력의 전횡, 전쟁과 반란의 발흥 그리고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날 때 신흥세력이 주도권을 잡고자 지기쇠왕설에 의한 수도천도론을 주장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나라가 약해진 상태에서 진행되므로 무리수가 따른다. 반란이 자주 일어나고, 특권층의 전횡이 심해지고, 세금이 거둬지지 않고, 백성의 삶이 팍팍할 때 신흥세력이 주도하여 기득권층을 배제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천도론이다. 나라의 재원이 신통치 않은데 수도를 옮기는 것은 겨울철 언발에 오줌누기식이다. 찬성하는 기득권층과 반대하는 세력 간에 대립과 분열이 야기되고, 나라의 재원이 탕진되므로 더욱 더 어려워지게 된다.

이것은 정치적인 하수가 국면전환을 통하여 특정집단의 이익을 구하고자하는 전술적인 정치술수에 불과하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지기쇠왕설을 주장하는 시기를 보면 나라와 사회가 어지러울 때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은 계층 간의 분열이 진행되고 있다는 조짐이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공민왕 때 신돈(辛旽. ?-1371)도 평양천도를 기획하였으나 실패하는 등 지기쇠왕설은 식을 줄 몰랐다.

■성공적인 한양천도

지기쇠왕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한양천도이다. 고려가 망하였으니 개경도 지기가 쇠하였으니 조선의 건국과 함께 한양천도의 이론적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라는 말과 같이 기득권층과 반대파가 많은 개경을 떠나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새로운 지지층을 결집시킨다는 정치적인 복안이 숨어 있었다.

이미 고려 숙종 때 김위제의 건의로 한양을 남경으로 승격하고 궁궐을 지었다. 고려가 창건되고 개경을 수도로 정할 때부터 한양은 이씨가 혁성혁명을 일으키는 땅으로 도선국사가 예언을 한 결과이기도 하다. 역성혁명에 대한 예방책으로 고려중엽부터는 한양의 예리촌(刈李村) 또는 벌리지(伐李址)에 오얏나무를 심었다가 베어내는 행사를 매년 시행했으나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자리 잡는 데는 그런 설화적이고도 역사적인 배경과 일치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오백년간 풍수학적으로 증명된 땅이었기에 한양은 조선의 수도로 점지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얏나무를 베어서 이씨에 의한 역성혁명을 저지하고자한 사실로도 백성들은 이씨에 의한 조선의 건국이 생소하지 않았을 것이며, 혁명주체가 한양을 수도로 선정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광해군 때 이의신의 교하천도론도 지기쇠왕설에 근거하고 있다. 역모나 반란의 동기로 이용되지는 않았지만, 도읍지의 지기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지기쇠왕설이 도읍지의 선정에 관련이 있었으므로 국가적인 차원이나 왕권의 차원에서 지기쇠왕설이 제기되었다. 달리 말하면 왕권을 강화하여 부국의 나라를 만들자는 충신(?)들의 입안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치밀한 저지운동으로 대부분 천도를 실패한 바람에 기득권층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진 반면, 나라의 기강이 흔들렸고, 왕권은 더욱 약해졌으며, 백성들의 삶도 더욱 피폐해져 풍수지리학에 대한 나쁜 인상만 부추겼다.

더 이상 풍수학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악용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기쇠왕설이 상권분석의 총아

지기쇠왕설은 지금은 거시적인 면 보다는 미시적인 면에서, 그리고 정치적인 면 보다는 경영적인 면이나 점포개발 관점에서 그리고 부동산의 투자분석측면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사랑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상권도 움직인다. 상권이 지기쇠왕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는 상권분석이나 마케팅에 활발하게 이용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서양학문에 매달려 통계적 접근에만 치우친 마케팅 분야의 한계이기도 하다.

도시계획과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구도심의 개발에 천문학적 비용과 협상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땅값이 보다 저렴한 외곽지역을 개발하여 현대적 주거건물을 건설하고 새롭게 상권을 계획하여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더욱 경제성과 효율성이 높다.

보다 우월한 경제적인 이유로 새로운 곳에 주거지가 건설되자 사람들은 거주지를 이동하게 되고, 구도심은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신거주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구도심의 상권이 죽었다는 것이 바로 지기쇠퇴설이 적용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자가용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인터넷이 전국을 하나로 묶어 놓았고, SNS 네트워크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시대가 되자 지기쇠왕설은 그 면모를 달리하고 있다. 지기쇠왕설에 의한 현상은 전국 곳곳에서 다양하고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KTX의 개통으로 지방대도시의 환자가 서울의 최고급의료시설로 원정 진료를 가는 바람에 지방 대형의료기관의 매출이 떨어지고, 경춘고속철도의 개통으로 춘천의 아파트값이 배로 올랐으며, 대구, 대전, 광주 등의 대도시뿐만 아니라 중소도시에서도 경제적인 규모의 신주거지가 신설되자 외곽도로로 연결된 신도심의 신상권이 새로운 구심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지방 중소도시와 대도시간의 도로가 확장되고 신설되자 대도시로의 흡입력이 강해져서 원정쇼핑이 성행하였고, 심지어는 맛집 찾아가기와 학원까지도 다른 지역으로 통학이 가능해졌다.

혹자는 광고만 잘하면 된다고 한다. 아무 곳에나 지어서 광고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광고비 지출로 사업이 망해나간다. 광고비 1억원에 매출이 8천만원도 못 미치는 꼴이 다반사다. 이런 점포가 좋은 점포(?)인가.

지기쇠왕설은 재물의 흐름을 읽는 풍수학적 코드이며 상권을 분석하는 매우 세련된 기법이다. 풍수학적인 개념을 적용하여 점포를 개발하고, 개발한 점포를 풍수마케팅적 관점에서 점검해 볼 것을 추천한다. 풍수사에게 의뢰하면 적어도 나만을 위한 정보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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