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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독재자 카다피도 무척 핵을 갖고 싶어했다. 그가 처음 핵에 손댄 건 1973년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지 4년, 서른한 살 때다. 카다피는 파키스탄과 손을 잡았다. 초보적인 핵기술이 흘러들어 갔다. 얼마 뒤 파키스탄 총리 실각으로 끝을 보지는 못했다.

1987년 카다피는 화학가스 같은 대량살상무기 시설도 지었다. 이때도 핵무기를 꿈꿨다. 2000년대 들어와 카다피는 중국·북한과 가까워진다. 장쩌민 주석이 2002년 4월 리비아를 찾았다.

카다피는 2003년 이라크가 미군에 점령당하는 것을 보고 미국과 대적해서는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2003년 12월 원자로 폐쇄, 핵무기 포기를 선언했다.

대미(對美) 관계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블레어 영국 총리가 리비아에 오고, 카다피가 EU 본부와 벨기에를 답방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EU는 곧 제재를 풀어줬다. 카다피·블레어는 사적(私的)인 우정까지 과시했다.

■카다피 최후는 김정은에겐 ‘악몽’

그러나 2011년 북아프리카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봄’ 바람은 41년 독재자 카다피를 비켜가지 않았다. 트리폴리가 반군 수중에 떨어지자 카다피는 서부로 도망쳤다. 과도정부에 정권을 넘기겠다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반군 폭격이 두려워 매일 밤 잠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해 10월 20일 자레프 계곡으로 가던 카다피 일행 차량이 공습을 받았다. 혼비백산한 카다피는 배수로에 숨어 있다가 반군에게 발각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북 회담에서 북핵 합의가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 섬멸됐던 리비아 모델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또한 “우리는 들어가서 그를 없앴고, 우리는 같은 것을 이라크에서 했다”고도 덧붙였다.

카다피의 최후에 미국이 뒤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를 없앤 것은 리비아 시민 봉기였지 미국이 아니었다. 트럼프는 리비아 사태를 정확히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트럼프는 ‘구체적 사실’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반군은 카다피를 붙잡는 장면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었다. 꼬챙이 같은 것으로 카다피 몸 여기저기를 찔러댔다. 픽업트럭에 실으려던 그의 몸뚱이가 반쯤 벗겨진 채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카다피의 최후는 김정은의 ‘악몽’일 것이다.

카다피가 김정은처럼 핵을 갖고 있었어도 최후를 피할 수 없었다. 제 나라 민중에게 핵을 쏘나.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든 하지 않든 ‘리비아 모델’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이 정권교체, 붕괴, 흡수통일, 침공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4노(No) 원칙’을 밝혔으나 이제 트럼프 대통령 입에서 강력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겠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당근’과 ‘최후통첩’ 앞… 택일해야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리비아 모델에 대해 “우리는 카다피에게 ‘당신을 보호하겠다. 군사력을 주겠다.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섬멸했다”고 설명했다.

카다피는 핵 포기 6년 뒤인 2011년 중동의 민주화운동 물결 속에 시민군에 의해 살해됐다.

과연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리비아의 과거를 제대로 알고 향후 북한 내부에서 체제위기가 발생해도 김정은을 보호해주겠다고 말한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김정은을 안심시키겠다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를 끝내 거부하면 카다피 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비핵화를 이룬다면 한국처럼 경제적 번영을 누릴 것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외부적 군사조치든 내부적 시민혁명이든 최후에 직면할 것이니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다.

북한은 다음 달 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까지 어떻게든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것이다. 미국은 일단 인내심을 갖고 조율에 나선 모습이다. <칭찬합시다 운동중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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