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풍수 - 새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여는 열쇠가 되다
땅 전체를 사람의 몸으로 보고 풍수적 판단을 한 우리나라 풍수의 조종 도선국사

신라왕조가 망하고 고려가 창건되었지만, 신라의 사람들 중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뭉쳐서 새로운 기운을 일구어낸 것이 고려이다. 새로운 기운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새 세상을 맞이하는 동력이 된 것이다.

신라시대에도 풍수가 유행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기록은 많지 않다. 그 당시 당나라는 중국풍수의 비조 양균송(834-900)이 활약하여 풍수학의 체계가 완성된 시기였다. 당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던 신라는 자연스럽게 당나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당나라의 지배층이 동이족이었으므로 그 문화의 성향이 비슷하여 큰 이질감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많은 신라인들이나 승려들이 당나라에 가서 활동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신라 고유의 사상과 충돌하기도 하고 또는 융합되기도 했을 것이다. 문화와 지역성향은 백리만 떨어져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풍수의 흔적을 삼국유사에서 찾아보자면, 석탈해의 초생달터의 호족 가옥을 탈취한 설화, 선덕여왕의 옥문지玉門池 여근곡女根谷 백제병사 퇴치설화, 진덕여왕은 네 곳의 신령산神靈山 이야기로써 지배층의 풍수적 식견을 엿볼 수 있다. 반월성 등 많은 풍수지명과 호족이나 선사禪師들을 중심으로 절터를 선정하는데 풍수가 널리 이용되었으며, 또한 풍수의 경전인 청오경이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최치원이 쓴 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 말의 지식층으로는 선종의 승려와 6두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사회적인 한계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사람들로 지방호족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들이 접하거나 공부한 풍수는 기존의 풍수와는 사뭇 달랐다고 추정된다. 기득권층의 풍수가 아닌 새로운 희망의 풍수였다는 것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시기의 풍수는 새 시대를 여는 미래지향적인 비젼의 학문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도선국사(827-898)의 풍수가 고려 창건에 정통성을 부여함으로써 고려의 정신적인 지주로써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다. 고려를 낳은 신라의 풍수, 도선국사의 풍수를 살펴보자

■새 시대 여는 미래지향적 학문으로

고려왕조의 시조인 왕건의 탄생설화에는 풍수적 예언이 깃들여있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개성에 택지를 마련하여 집을 짓는데, 도선국사가 지나가다 들러서는 집을 짓는 방법과 구조 그리고 건물의 방향을 알려주고는 그대로 지으면 삼한을 통일하는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는, ‘건’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풍수사상이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미 민도가 높아져서 신화적인 이야기로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진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음은 <옥룡사비문>에 적혀 있는 왕건의 탄생에 관한 도선국사의 풍수적 역할이다.

“대사가 장차 천명을 받아 특출한 자가 있을 줄 알고 간간이 송악군(松岳郡 지금의 개성)에 가서 놀았다. 때마침 우리 세조(世祖 고려 태조의 부친)가 송악군에 살림집을 짓고 있었다. 대사가 그 문 앞을 지나다가 하는 말이, “여기는 마땅히 왕이 될 자가 날 것인데 이 집을 경영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구나.”하였다. 마침 계집종이 이 말을 듣고 들어가 세조에게 알리니, 세조가 급히 영접해 오게 하고, 들어가 그가 시키는 대로 고쳐 짓게 하였다.

대사가 다시 하는 말이, “고친 뒤 2년 만에 반드시 귀자를 낳으리라.”하고, 한 권의 책을 지어 봉하여 세조에게 바치면서 하는 말이, “이 글은 장차 그대가 나을 아들에게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장년이 되거든 주라.”했다. 이 해 신라 헌강왕이 새 임금으로 되니 당나라 건부(乾符) 2년인데 4년(877)에는 우리 태조가 과연 앞서 말한 그 집에서 태어났다. 장년이 되자 그 봉해서 준 책을 받아 보고 천명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알고 도둑들과 포악한 무리들을 없애버린 다음 국가를 처음 이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역)

■도선국사, 고려 정통성 부여에 활용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풍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이인(異人)이 산천순역의 형세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인은 단군이래로 토착화되어 전수되어온 신선도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이인異人의 풍수는 음양오행술도 아니고 술법풍수도 아니며 중국풍수도 아니다. 비문에 의하면 그 후에 음양오행술을 가미했다고 하므로 이인(異人)풍수야 말로 도선풍수의 핵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최창조는 자생풍수를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대사가 옥룡사(玉龍寺)를 중건하기 전에는 지리산 구령(毆嶺)에서 암자를 짓고 있었는데, 이상한 사람이 대사의 앞에 와서 뵙고 말하기를, “제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 지가 근 수백 년이 됩니다. 조그마한 술법이 있으므로 대사님에게 바치려 하니, 천한 술법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뒷날 남해의 물가에서 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대보살(大菩薩)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입니다.”하고, 간데 온데 없어졌다.

대사가 기이하게 생각하고 그가 말한 남해의 물가를 찾아갔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順逆)의 형세를 보여 주었다. 돌아본 즉 그 사람은 없어졌다. 그 땅은 지금 구례현(求禮縣)의 경계인데, 그 곳 사람들이 사도촌(沙圖村)이라 일컫는다. 대사가 이로부터 환하게 깨달아 음양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비록 금단(金檀)과 옥급(玉笈)의 깊은 비결이라도 모두 가슴속에 새겨 두었다.“ (옥룡사비문 : 한국고전번역원 역)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