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 풍수 ‘훈요십조’서 위력
도선국사가 창건한 白雲山內院寺事蹟(백운산내원사사적)에 이르기를 ‘사람의 질병을 쑥뜸으로 고치는 것처럼, 산천에 결함이 있는 땅은 절을 지어 보호하고, 기세가 지나친 땅은 불상으로 막고, 기운이 달아나는 땅은 탑을 세워 멈추게 하고, 기운이 거슬리는 땅은 당간을 세워 기를 걸면 천하가 태평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땅 전체를 사람의 몸으로 보고 풍수적인 판단을 했다.
도선의 비보풍수는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서 그 위력을 발한다. 제2조는 비보사탑설에 의해 사원을 지었으니 도선국사가 정한 곳 외에는 절을 짓지 말라는 유훈이다. 제5조는 서경이 고려를 유지하는데 풍수적으로 중요한 땅이니 유념하라는 말이며, 제8조는 차현이남의 땅은 배역의 땅이니 그곳 출신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산천의 성정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지령사상을 보여준다.
제2조, 사원들은 모두 도선이 선정해 산수가 좋고 나쁨을 가려 세운 것이다. 도선이 말하길 자신이 선정한 곳 외에 망령되게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을 훼손하게 돼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라 했다.
제5조, 짐이 삼한산천의 신령의 도움을 받아 대업을 이뤘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만대왕업의 땅이라 할 수 있다. 마땅히 4계절의 가운데 달에 백일이상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제8조, 차현 이남의 공주강 바깥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방향으로 뻗어 있고 인심 또한 그러하니 그 나래에 잇는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거나 왕후·국척들과 혼인을 해 국정을 잡게 되면 변란을 일으키거나 동합에 원한을 가져 왕실을 침범해 난을 일으킬 것이다.
도선은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혜철선사(791-861)의 직계 제자로 선승(禪僧)이었다. 혜철선사의 스승이었던 서당지장(西堂智藏)도 밀교승으로 알려진 분이다. 도선의 풍수는 선종을 부흥시키기 위한 법용(法用)으로 왕건의 고려건설과 국가 기틀의 안정화에 대한 열망이 부합됐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는 도선국사가 비보풍수를 단행한 결과물로써 특히 1·2·6조는 그의 행적이 선종 교세를 부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려의 역사를 통틀어 도선풍수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지대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한양을 예언했다. 그 증거로 만월대를 보호하기 위해 한양의 삼각산 규봉을 제압할 석견(石犬)을 놓았던 자리인 좌견교가 선죽교 남쪽에 있다. 도선의 풍수는 무학대사를 통해 조선을 만들었으며, 조선 후기에 도선비기는 양반들의 이기적인 탐욕의 대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도선국사의 이름을 빌리는 자가 있으니 우리나라 풍수의 조종으로서 흔들림이 없다 하겠다.
■‘기틀 안정화’ 열망과 부합돼
도선의 풍수는 중국풍수에서 보이는 술수풍수나 음택풍수와는 달리 우리나라 고유의 현묘한 도(고신도·풍류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풍수적 행적으로 그 일면을 알 수 있다. 도선풍수는 역사적으로 신라풍수이지만 고려에서 빛을 발했으니 신라의 풍수가 고려를 낳은 것이다. 풍수가 새로운 왕조 창건의 정통성을 부여한 바가 됐다.
불교적인 풍수관이나 밀교적 풍수관은 교리적으로 분석을 해 보아도 음택보다는 양택에 치중한다. 불교교리에 의하면 육체는 이승에 나오면서 빌려 입는 옷에 비유할 뿐이고, 사후에는 극락왕생이 목적이므로 시신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전에 어떻게 사느냐에 관심을 두므로 양택풍수에 중점을 둔 것이며, 교세의 부흥을 위해 고려의 비보를 위해 삼한 땅 곳곳에 사탑의 건립을 추진했던 것이다.
도선풍수의 위력이 천년을 지나도 꺼지지 않는 것은 택지선정과 양택건립에 관한 풍수를 통해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의 탄생을 이끌어 냈다는 것에 있다. 풍수의 위대함은 세상을 구원할 사람을 배출하는 것인데 도선은 그것을 해낸 것이다. 그의 풍수가 고려를 낳은 것이다.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일간투데이
dtoday01@d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