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개국을 부강기회로…신문물 수용
얼마 전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인 야마구치(山口) 현의 시모노세키, 하기 등을 둘러봤다. 시모노세키는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이 맺어진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고, 하기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기둥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그 문하생 이토 히로부미가 출생한 곳이다. 우리 모두에겐 우울한 장소지만 마음을 비우고 돌아봤다. 요시다는 막부를 대신할 통일국가를 출현시키지 않으면 일본 침략을 노리는 구미 열강에 대항하여 독립 국가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파한 인물로 유명하다. 야마구치 현은 역대 일본 총리 62명 중 8명의 총리를 배출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명문 현’이다. 이 곳 출신 총리 중,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 조선 초대 총독 테라우치,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 총리인 사토, 현 아베 총리가 있음을 알게 됐다. 하나 같이 마음에 내키지 않은 인물들뿐이다.
메이지 유신은 첫째, 개국을 일본의 부강기회로 보았기에 세계의 다양한 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였고 큰 파탄 없이 성공시켰다. 위기를 맞게 되면 폐쇄적 쇄국으로 가기 쉬운데, 일본은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점에서 19세기말까지 위정척사의 유림세력이 지배한 조선과 비교된다. 일본은 막부 때부터 개국과 개항을 통해 자기 혁신을 지속적으로 해왔기에, 유신만으로 부강해 진 것으로 보긴 어렵다. 역사가 칼로 잘라낸 것처럼 뚝 떨어져 발전할 수 없듯이 유신은 도약의 계기였을 뿐이다. 막부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린 것이다.
셋째,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프랑스 혁명 등 세계의 대부분의 혁명은 피지배층이 지배층을 상대로 ‘구 체제’를 타도하는 성격을 지녔지만, 메이지 유신은 지배층의 자기혁신에 의한 것이었다. 구 체제의 흔적을 남기면서도 불필요한 파괴와 희생을 최소화한 질서 있는 효율적 변혁이었다.
■ 지배층 자기혁신 통해 희생 최소
일본은 자부심이 강하다. 외세의 침입을 받지 않았고, 중국의 조공질서에 편입되지도 않았으며, ‘혈통이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존속됐다’는 만세일계를 자랑하면서 역성혁명은 모른다고 한다. 자부심가질 만 하지만 자부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다. 일본의 독선은 자신은 선택받은 국가이고, 세계를 제패할 실력과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만국의 통일을 제창하기까지 했다.
1930년대의 일본의 군국주의가 갑자기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은 피지배층이 체제를 전복한 적이 없다. 반면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개혁(3.1 운동, 4.19 혁명, 6.10 항쟁)이 강하다. 그래서 일본은 우리의 100만 촛불혁명을 부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배울 점이 적지 않다. 위로부터의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꾸준한 개혁으로, 격변의 사회변동 없이 고쳐나가는 모습이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일본은 1946년에 만들어진 일본헌법을 한 차례도 고치지 않으면서 헌법현실에 적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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