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風雲兒) JP가 떠났습니다. 김종필(金鐘必) 전 국무총리가 6월 23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합니다. 향년 92세. 사인(死因)은 노환으로 전해졌습니다.

JP는 정치에서 은퇴한 후 ‘정치는 허업(虛業)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실업(實業)인으로 갔으면 돈관이나 모았을 텐데 정치가는 허업입니다. 실업은 움직이는 대로 과실을 따니까 실업이지요. 경제하는 사람들을 왜 실업가라고 하냐면 과실을 따먹거든.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은 이름은 날지 모르지만 속은 텅텅 비었어, 나도 2~3년 후에는 어떻게 살까 걱정이여.”

김 전 총리의 서거(逝去)로 국내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왔던 이른바 '삼김(三金) 시대'의 주역들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김 전 총리는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5년제인 공주중학교를 4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대전사범학교를 수료했지요. 그 후, 1946~1848년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부를 거쳐 1949년 육사 8기로 졸업했습니다.

육사에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으며 박 전 대통령 소개로 배우자인 박영옥 여사를 만나 1951년 결혼했습니다. 김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정계에 입문해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으며 박준규 전 국회의장 ·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함께 9선으로 역대 최다선 의원을 역임했으며, 11대(유신정권)와 31대(DJ정권)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입니다.

■43년간 한국정치 중심에 선 김종필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61년 5.16 쿠데타를 기획하고 감행하면서이지요. 쿠데타 직후 김 전 총리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내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활약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5세였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때부터 2004년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43년간 한국 정치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처조카로 정권 ‘2인자’로 올라선 김 전 총리는 그러나 1969년 ‘3선 개헌’을 계기로 권력의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져갔습니다. 박정희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으로 1971~1975년 제11대 국무총리를 지내며 유력한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됐으나 ‘3선 개헌’과 ‘유신 선포’로 두 번 대통령의 꿈이 좌절됐습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서울의 봄’ 정국에서 김 전 총리는 김영삼 의원(신민당), 김대중 전 의원과 함께 유력한 대선주자로 다시 거론됐었지요. 그러나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정치 활동을 금지 당했습니다. 신군부는 이 과정에서 김 전 총리를 부정축재자로 지목,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미국에 머물며 잠행하던 김 전 총리는 1987년 6·10 민주항쟁을 계기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13대 대선 후보로 나섰으나 고배를 마셨습니다. 김 전 총리는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쳐진 민주자유당에 몸을 실었다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당내 민주계에 의해 ‘2선 후퇴’를 요구받으면서 탈당,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습니다.

자민련은 이듬해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켜 충청권을 기반으로 무려 50석을 얻는데 성공했고 김 전 총리도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김 전 총리는 1997년 DJP(김대중, 김종필, 박태준)연합을 통해 총리에 재임하게 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갔지만 2001년 내각제 개헌 문제로 DJ와 결별 수순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참패,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설치는 정치인 보며 “정치는 허업”

김 전 총리는 2008년 말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휠체어에 의존해왔습니다. 그리고 2013년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雲庭會)’ 창립총회를 열고 2015년에는 43년의 정치인생을 펴낸 책을 출간하는 등 최근까지도 정치적 행보를 이어왔습니다.

JP는 ‘정치9단’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 족적을 뚜렷하게 남긴 풍운아였습니다. 하지만 훗날 ‘제2의 을사조약’이라는 저항을 부른 ‘김종필-오히라 메모(1962)’로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풍운아 JP는 ‘정치는 허업’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를 하려면 때로는 편의상 말을 바꿀 수도 있지만 절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도 강조했습니다. 또한 "백성을 호랑이 같이 여기라"고도 했습니다. 호랑이는 배가 고프면 아무나 물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이 말은 백성을 무섭게 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권의 하는 일을 보면 허업인줄도 모르고, 또 백성을 아무렇게나 보는 거짓말투성이로 일관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깨끗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주의 주장이라도 그 주의 주장을 오손(汚損)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무리(無理)로 나를 선전하고, 모략으로 남을 공격하는 정치인은 혹 일시적 선동은 할 수 있으나 최후의 승리는 결코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의를 모르고 날뛰는 정치인은 살아도 가치 없는 일생이요, 죽어도 값없는 죽음입니다. 또한 양심을 굽혀 형세에 따르는 사람은 혹 일시의 보신(保身)은 된 듯하나 만년의 치욕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 있는 사람은 지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거짓 없이 그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일이 갈수록 그 일과 공덕이 찬란하게 드러나는 법이지요. 그러나 어리석은 정치인은 그 일에는 충실하지 못하면서 이름과 공(功)만을 구하므로, 결국 이름과 공이 헛되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노 정객 JP는 정치를 허업이라 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는 허업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상극의 마음을 가지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막말을 하는 정치인의 씁쓸한 퇴장을 요즘 보노라면 왜 저리도 세상사는 이치도 모르면서 정치를 한다고 설쳐댔는지 측은지심(惻隱之心)마저 듭니다. 상극의 마음이 화를 불러오는 근본입니다. 반대로 상생의 마음은 복을 불러들이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서원(誓願)과 욕심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서원은 나를 떠나 공(公)을 위하여 구하는 마음이요, 욕심은 나를 중심으로 사(私)를 위해 구하는 마음입니다. 어쩌면 풍운아 JP가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은인자중(隱忍自重)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덕권 원불교 전 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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