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욱신 경제산업부 기자

[일간투데이 이욱신 기자] 일본 도쿄 일본은행 화폐박물관에는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는 특이한 화폐가 있다. '인삼 대금 지급을 위해 옛날방식으로 돌아가 만든 은화'라는 뜻의 이 화폐는 우리의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일본 에도(江戶)막부 시기에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점은 이 돈이 자국 내 통용이 아니라 조선과의 무역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은(銀)은 오늘날 달러화처럼 17세기 세계무역의 결제통화로 널리 쓰였다. 이 시기 일본은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한 은을 생산했다. 은 생산이 잘 되던 시기 일본은 '게이초(慶長)은'이라는 순도 80% 고급 은화를 써 가며 조선 인삼을 수입했다. 하지만 은 생산량이 떨어지고 조선 인삼으로 지출되는 은화로 재정부담이 커지자 일본 막부는 순도 64%의 '겐로쿠(元祿)은'을 새로 만들어 조선에 인삼의 대가로 내놓는다.

오늘날로 치면 달러화 평가절하에 해당하는 순은량 감소에 조선 정부는 반발했다. 겐로쿠은이 나올 때 조선과 일본의 무역에서 은이 차지하는 비중이 40% 정도라 하니 조선이 순은량 감소에 펄쩍 뛴 것은 당연했다.

당시 일본에선 '신비의 영약(靈藥)'인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천정부지여서 일본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조선 정부의 요구에 따라 예전 게이초은처럼 순은 함량 80%은을 따로 만들어서 조선에 보냈다. 이게 바로 인삼대왕고은이다. 일본 내에서는 만성적인 재정위기 상태였던 막부가 그 해결책으로 지속적으로 순은 함량을 낮춰 20%까지 떨어진 은화가 나왔지만 조선 수출용 은화의 순은 함량만은 80%선을 지켰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렇듯 조선만을 위해 만든 특별은화가 자취를 감춘다. 일본이 인삼을 수입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으로의 은화 유출로 무역·재정수지 악화를 겪은 막부 정부가 재정개혁조치로 사치품인 인삼 수입을 억제하는 한편 조선에서 재배기술을 도입해 자국 내 생산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 수출의 든든한 효자였던 이른바 '반·디' 산업이 올해는 심상치않다. 디스플레이는 중국발 LCD(액정표시장치) 공급과잉으로 호되게 시련을 겪고 있고 반도체 또한 올해 하반기부터 중국 업체들이 본격 양산에 들어가면 빨간불이 켜질 전망이다. 우수한 품질에 자족하다가 상대국의 자체 생산으로 몰락한 산업의 증거물은 인삼대왕고은 하나로 족하도록 우리 반·디 산업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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