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상 편린 찾아 고유 풍수 복원해야

우리의 풍수는 우리 고유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우리 고유 사상의 편린을 찾아 복원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우리에겐 우리의 것이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가 중국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우리의 것과 중국의 것이라고 선을 긋기 전에 우리의 것이기도 하고 중국의 것이기도 한 공동자산인 것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자기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발해만과 만주가 바로 우리의 조상이 경영하던 고토(古土)이다. 만리장성이란 국경선이다. 만리장성 밖의 땅은 단군, 고구려, 발해, 고려를 이어서 우리의 영역이었다. 역사서를 읽어보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 역사는 식민역사의 잔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발해와 만주가 중국의 땅이 된 것은 150년 정도에 불과하다. 만주에서 발흥한 원나라, 발해국,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형제국을 약속한 동이족의 나라였다. 고서에는 구이(九夷) 즉 아홉 개의 동이족 국가가 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들이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풍수로 일어난 왕조 풍수로 망해

유목민의 영토인 만주는 바로 우리의 영역과 동일하다. 일례로 윤관장군이 설치한 6진은 두만강에서 700리나 북쪽으로 떨어진 곳이라고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이 사실은 만주에서 활동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공험진이란 곳이 있음을 증명해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만주를 돌아보고 오신 나의 백부님과 친구 부친의 견문을 들어보면 만주는 완전히 조선이었다고 한다. 중국문화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영역 뿐 아니라 정신에 있어서도 도가는 단군의 고신도(신선도, 풍류도)가 기원이었으며, 유가도 공자가 동이족인 은나라 왕족의 후예이므로 단군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나 종법주의에 오염돼 그 순수성을 잃어버린 탓에 중화주의의 정신인양 홍보되고 있는 것이다.

묘청은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로 창의적인 발상을 갖고 있었으나, 조직적이지 못하고 세련되지 못한 결정으로 판세를 일지 못해 국풍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단재 선생은 이를 두고 ‘묘청의 광망(狂妄)한 거동(擧動)’이라고 표현했다. 이로써 발해왕조가 경영하던 우리의 고토를 회복할 기회를 놓쳐버린 한탄스런 역사를 만들고 만 것이다. 물론 고려 말에 최영 장군의 기치 아래 요동정벌이 진행됐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거의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다. 독선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개경파의 전략으로 실패한 서경파의 몰락은 대국적 기상을 가진 묘청의 풍수적인 안목을 활용하지 못한 채 고려를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고려 말에 신돈(辛旽·?-1371)이 등장해 도선풍수를 활용해, 충주천도론을 꾸몄지만, 개경파의 반대로 천도는 무산됐다. 잦은 천도론은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고, 기득권층인 권문세가의 익숙한 조직적 저항을 초래해 국론이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왕권의 추락과 민심의 이반은 이성계가 주도한 역성혁명(1392)의 기회를 부여해줬을 뿐이다. 이로써 풍수로 일어난 고려왕조는 풍수로 망하게 됐다.

■국가적 대사 도모에 활용 의미를

천도론이 자주 나타난 이유는 기득권층인 개경파를 척결하기 위한 비책이었다. 그러나 개경파인 권모술수와 권력게임에 약한 낭불가 계통 승려의 열정은 권문세도가인 개경파들의 치밀한 저항과 강렬한 반대에 막혀 매번 실패한다. 천도론에 있어서 개경파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승리를 거머쥔다. 이로써 도선풍수는 권력쟁탈의 다툼에서 승자가 아닌 패자에 소속돼 백성이나 지배자들에게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기 못하게 되고 조선은 새로운 풍수를 갈망하게 된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도선풍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불행히도 권력에서 패망한 자들이 활용한 것이 도선풍수였기에 우리의 국풍은 민간풍수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나라와 땅은 그대로이고, 풍수도 그대로인데, 술법가들의 잘못으로 고려풍수는 고려를 망하게 한 꼴이 돼버렸다. 나라만 흥망성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에도 흥망성쇠가 따르는 바이니, 왕조의 말기적 폐단이 풍수 술법적 폐단으로 나타난 상황이었다. 그들은 모두 풍수만 알았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풍수는 나라의 건전성을 위해 활용됐으며, 나름대로 시대적 사명을 띠고 전통적인 의미에서 국격을 높이기 위해 국가적 대사를 도모하기 위해 풍수가 사용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돼야 한다.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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