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에 대한 무학대사의 풍수컨설팅

새로운 왕조를 세우면 그 기틀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지지층이 필요하고, 전왕조의 기득권층을 도태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도읍지 이전이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1392년) 조선의 수뇌부가 가진 화두는 수도이전이었다. 도읍지 이전에는 풍수지리학의 활용은 불가피하다.

풍수학은 도시계획학이요, 생태학이며, 건설학이었다.

우리나라 풍수는 도선국사의 풍수가 주맥을 이루고 있다. 고려풍수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도선국사 풍수의 계승이다. 도선국사의 풍수는 밀교풍수에서 나온 비보풍수와 도참사상 그리고 단군사상이 연결된 풍류도에 음양오행론이 통합된 풍수이다. 도선(道詵)과 무학(無學)이라는 이름에서 불가의 승려이면서 도가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같고, 도참사상을 주창하는 것에서도 같은 맥락이다.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불교풍수와 조선의 유교풍수가 한바탕 힘겨루기가 진행된다. 고려풍수의 계승자는 무학대사(자초)이고 신진유교풍수의 주창자는 정도전과 하륜이었다.

■도읍지 결정에 불교·유교 힘겨루기

조선 초기 왕조실록의 기록을 볼 때, 조선 건국과 한양 도읍지 지정에 대한 무학대사의 활약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일반적으로 판단할 때에는 무학대사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학을 나라의 기틀로 세우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전 왕조의 기틀인 불교에 대한 억압이나 탄압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통치적 흐름이다.

또한 정사의 기록자가 모두 신진 유학생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살펴본다면 무학대사를 고의로 무시하거나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생들이 이성계가 세운 회암사를 불 질렀는가 하면, 자초의 비까지도 유생이 파괴하고 있다. 실제로 자초 사후에 태종과 신료들이 자초를 비방 또는 혹평하는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다. 이성계 때에는 정도전이, 이방원 때에는 하륜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새 수도건설은 태조 이성계가 주춧돌을 놓았으나 정종은 개경으로 환도하는 바람에 태종 이방원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그런고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이방원)이 유교의 나라를 세우려고 노력한 흔적으로 무학대사의 업적을 고의로 축소하여 억불정책을 편 것이다.

반면에 조선 후기의 실록에 의하면 무학대사는 왕조창업의 공로자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건원릉의 소점자가 무학대사임을 밝히고 있으며, 한양천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지대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선조실록, 현종실록, 영조실록) 태조실록에서도 화암사에 머물고 있는 무학대사를 이성계와 신료들이 찾아 왔다고 한다.

■무학대사‚ 신진세력 패착 이끌어내

이성계가 계룡산, 무악 그리고 남경의 지세를 살피기 위해 순행할 때에 무학대사가 항상 호종하였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 기록이 보인다.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저항 때문에 드러내고 무학대사의 의견을 듣지는 않았으나 그의 의견은 바로 이성계의 결정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읍지에 대한 무학대사의 풍수적인 의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신진관료세력에 의해 계룡산 도읍지로 이전을 결정하고 1393년3월1일-12월11일까지 도읍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1393년2월8일 계룡산 도읍지를 살펴본 후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는 답변을 고한다.

그리고 나서 하륜이 지리신법을 적용한 결과, 도읍지로 적절치 않다고 보고하자 건설을 중지한다. 신진유교세력의 패배를 기록한 것이라 생각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계룡산 도읍지의 공사 중단을 무학대사가 아닌 하륜의 공으로 돌린다. 하륜의 의견은 바로 이방원의 심중으로 보아야 한다. 신진관료세력의 패착으로 계룡산은 물 건너간다.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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