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들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스토리를 갖고 있지만, 부끄러운 유산도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히로시마의 평화공원이다. 평화공원의 공식명칭은 ‘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몰(死沒)자 추도 평화기념관’인데, 국가가 원폭사망자의 숭고한 희생을 추도하고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며, 원폭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계승하기 위한 시설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원폭 돔이다. 원폭이 원폭 돔 수직 600미터 상공에서 터지는 바람에 건물 벽의 일부가 붕괴를 면했고, 건물 최상부에 남아 있는 돔형 철골형태 때문에 원폭 돔으로 불리 운다.

■ 日 피해자로 둔갑시킨 ‘원폭공원’

원폭 돔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평화공원이 나오며, 이곳에는 평화의 종, 평화기념 자료관 등 다양한 조각과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다. 원폭투하시간인 1945년 8월 6일 8시 15분을 나타내는 기념물과 함께 사망자 추도공간이 눈길을 끈다. 원폭사망자를 추도하면서 평화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벽면에는 피폭 후 거리모습과 1945년 말까지 사망한 숫자인 14만 장의 타일을 사용해 파노라마 형태로 희생자 및 당시의 지명을 표시하고 있다. 기록국가 일본답다.

또 공원에는 두 개의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일본인 위령비가, 그 서쪽에는 한국인 위령비가 있다. 한인 위령비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와 희생된 선조들을 추모하기 위해 일본거주 한인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그 수가 2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 정말 많은 분들이 원치 않는 억울한 희생을 당했다. 위령비는 나라 없는 서러움, 원통함 그 자체였다.

평화공원은 원폭피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면서 다시는 이런 참사가 없기를 바라며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공원어디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글귀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만행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히로시마에서 희생된 숫자보다 수십 배 많고, 피해는 수백 수천 배가 넘는데도, 일본은 자신을 피해자로만 보이려 한다.

원폭투하의 정당성 여부에 관해 불가피성을 지지하는 주장은, 첫째 일본 지휘부는 1억 일본국민은 열강에게 비굴하게 항복하지 말고 아름답게 옥처럼 부서지자는 ‘1억 총 옥쇄’를 주장하면서 결사항전을 표명했으며, 둘째 일본본토에 미군이 상륙할 경우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예상됐고, 셋째 미국은 일본에 대한 소련의 몫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소련의 일본본토에 대한 개입이 있기 전에 신속히 전세를 바꿀 필요가 있었으며, 넷째 원폭 없이는 전쟁을 신속하게 끝낼 수 없었기에, 원폭을 최상의 선택이라고 한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가만히 둬도 무릎을 꿇고 전쟁은 끝났을 것인데, 무고한 민간인들을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고 하면서, 원폭의 부당성을 강조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세계의 정치지도자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었다. 이들은 1945년 2월 소련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독일처리를 논의했다(얄타회담). 당시 미국은 아직 핵무기가 완성되지 않은 불명확한 시점이었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참전과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소련으로부터 독일 항복 후 3개월 이내에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약속받았고, 그 대가로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소련에게 반환해주기도 했다. 얄타에 이어, 동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전후 일본처리를 논의했고, 일본의 항복을 권고했다(포츠담선언). 포츠담 회담은 ‘미영소’가, 포츠담 선언은 ‘미영중’의 서명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중국 장제스가 중일전쟁 중이라 회담에 참석하지 못하면서 서명만 했고, 소련은 아직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이어서 서명에 빠져있다. 회담과 선언의 ‘참여자와 서명자’가 달라 당사자에 혼란을 주고 있다.

■ 전범책임 평화를 가장해 희석

트루먼은 1945년 4월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서거로 대통령이 된 인물로, 처칠과 스탈린에 비해서는 무명이었고, 2급 정치인이었다. 미국은 7월 16일 원폭실험에 성공했기에 7월 26일 포츠담의 트루먼은 2월 얄타의 루스벨트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이런 트루먼에게 원폭은 전쟁의 신속한 마무리 수단으로 미군의 희생을 줄여주면서, 소련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전지전능한 무기였고, 그럼으로써 ‘세 거물을 한 거물’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트루먼에게도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특히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의 관동군을 치기위해서는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러면서 소련이 일본 본토에 발을 딛기 전에 승리를 해야 했다. 결국 트루먼에겐 원폭이 유일한 답이었고, 항복을 받아낼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전쟁은 히로시마의 원폭투하 9일후 끝났다.

일본은 아닌 척 하지만 ‘피해자 코스프레’에 치중하고 있다. 일본에게는 전범국의 책임의식이나 가해자의 죄책감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자신을 전쟁의 피해자로 생각하게 하면서, 전쟁의 책임을 부정하고, 가해를 부정하며, 피해자(위안부, 강제징용)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또 민간인이 핵공격을 받은 불쌍한 나라로 포장하고 있다. 원폭 희생자에 대한 추모는 필요하나, 역사적 반성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전범의 책임이 평화를 가장해 희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원폭이 아무리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가져올 수 있는 파괴적 무기라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히로시마의 원폭은 ‘필요악’으로밖에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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