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도읍지 정하는 과정에 고려 불교풍수와 조선 유교풍수간 힘겨루기

새로운 도읍지 물색에서 하륜은 무악산(안산)의 신촌부근을 도읍지로 추천하여 1394년2월18일 후보지를 살핀다. 물론 바로 전날(2월17일)에 이성계는 연복사로 찾아가서 무학대사를 만난다. 여기서 무악산후보지에 대한 답변을 구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관료들도 무악산 후보지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하륜의 풍수적인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북악산의 지세를 살피면서 자문을 구하매, 무학대사는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 하다”고 대답하여 이성계가 기뻐했다. 1394년 8월24일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되었다. 이성계의 심중에 한양 북악산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은 도선국사가 예언하였고 무학대사가 추천한 북악산의 한양으로 정해진다.

한양으로 도읍지가 정해진 뒤에도 경복궁의 향배를 놓고 또 다시 힘겨루기가 진행된다. 무학대사는 불교적 관점에서 동향을 권하였고, 정도전은 유교적 이념 구현을 위해 남향을 적극 주장한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의 오른팔이었으며, 유・불・선에 관한 그의 학식 또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현실적으로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만, 무학대사의 도참설은 조선의 액운을 예언하고 있다. 어쨌든 경복궁의 방향을 정함에 있어서 유교풍수의 승리는 조선풍수의 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양 도읍지 이전에서 고려풍수의 공을 신진유교풍수가 가로챈 듯 한 느낌이다.

무학대사의 풍수적인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국가대사에 무학대사가 거론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도전이나 하륜이나 다른 풍수사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서 무학대사의 풍수적 결정력은 이성계를 통하여 시행되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와 막역한 사이로 긴밀한 의견을 나누는 풍수참모였다.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긴밀한 논의의 내용을 정사에 기록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성계가 신료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듯한 형식을 취했지만, 한양으로 도읍지로 결정한 것은 이성계(태조)였으므로, 풍수에 관한한 이성계의 결정은 바로 무학대사의 결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기야 억불정책을 채택한 조선왕조가 불교풍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출발부터 단추를 잘 못 끼우게 되고 민심을 아우르기가 곤란해지므로 조선초기의 실록에는 정도전과 하륜의 풍수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여 기록했으나, 조선 후기에는 무학대사의 풍수적인 입지를 비교적 정확한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이외에도 이성계의 건원릉을 무학대사가 소점한 사실과 정종의 후릉을 소점한 사실도 조선 후기의 실록에서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결국 야사野史가 정사正史로 채택되어 제자리를 잡았다.

고려의 불교풍수가 조선 한양의 주춧돌을 놓았다. 이로써 풍수는 한민족의 미래를 열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한 왕조가 사라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전왕조가 새 왕조의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특이한 발전과정이다.

전혀 다른 이민족이 정복하고 신왕조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시적인 파괴나 사상적인 퇴조가 없었으며,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지배층이 노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려의 풍수를 밑거름으로 새로운 유교풍수가 정도전이 시작하고 있다. 이로써 풍수학이 한민족의 비젼을 제시하는 학문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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