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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논단] ‘존경심’을 버리다황성철 칼럼니스트
   
요즘은 모두 힘들어 주저앉고 싶어 한다. 그래서인지 치유라는 뜻의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누군가 건네는 따뜻한 손길, 다정한 말 한마디에 위안을 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어 한다. 이런 때일수록 ‘비움과 내려놓음’의 지혜를 배우는 게 어떨까 싶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종교에서는 이를 수행의 화두로 삼을 만큼 난제이다. ‘비움’은 불교적인 용어이고 ‘내려놓음’은 기독교적인 용어에 가깝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내려놓으면 모두 빼앗긴다고 유혹하지만 하늘의 진리는 우리가 비우고 내려놓을 때 온전한 우리의 것이 된다고 약속한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내 것’처럼 보이지만 남김없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있다. 힘겹게 쌓아올린 명예, 꼭 움켜쥔 재물, 미래의 불안과 생명의 위험까지 절대자 앞에 내려놓을 때 진정한 쉼과 참된 평안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런 틀 위에서 함께 생각해보자. 비록 불제자가 아니더라도 대다수 대중이 이름을 알고 존경하는 어느 큰 스님의 에세이를 읽다가, 심하게 배신당한 듯한 허탈감을 느껴 감히 그분을 나무라고자 한다. 그 책 속에서 '아름다움'이란 제목의 글을 읽었다. '낯모르는 누이들에게' 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글이었다. 평소 '무소유'를 주창해 오신 스님께 보낸 존경심을 철회코자 한다. 아래 글은 그 분의 글 일부이다.

■ ‘더러움’에 애써 외면한 유명 수행자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지거리는 듣는 마음속까지 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나 다름없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읽고 나야말로 터져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억지로 참았다.​ 그러나 나오려는 욕지거기를 오래 참으면 병이 되는 법, ‘배설’ 하고자 한다. 그 시절의 여차장이라면 아직 어리고 여린 누이들 일진대, 어떻게 썩어가는 시궁창에다 비유하고 구제할 가치도 없으니 그 속에서 그냥 썩어져라 하고 야멸차게 내 버리고 돌아 설 수가 있었는가.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이 아닌가. 그것이 부처님의 제자라 칭하는 수행한 자의 도리인가. 더러운 것 다 외면하고 나 혼자만 청정하게 살다 가면 저절로 극락세계가 맞아주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떠나지 않는다.

나 같으면 그 아이들을 타이를 것이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신심(信心)이 없을지라도 세상을 더 살아온 어른들이라면 말 그대로 시궁창 악취 같은 욕을 되받아 먹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 누이들을 그냥 내 버릴 게 아니라 나무라고 타이르고 옳게 이끌려는 노력이나마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른 된 자들의 도리 아니겠는가.

그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대부분 서민층의 자녀들이 단지 먹고 살기위해 초등학교 나마 간신히 졸업하면 공장으로, 버스차장으로 식모살이로,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 친구들을 이별하고 산산이 흩어졌던 시절이다. 곱게 인성을 기를 기회를 주지도 못하고 망쳐먹은 기성인들이 그 애처로운 누이들의 가벼운 언행을 나무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 빈민굴 찾은 英여교사와 대조

영국의 빈민굴 '브랜트' 지역은 ​범죄의 온상지로 유명했다. 세계의 이민자들이 들끓는 '브랜트'의 어린이들은 영어를 몰라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는 결국 범죄자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안드리아 자피라쿠'라는 여 선생님은, “아이들이 영어를 모르면 내가 아이들의 말을 배우면 된다”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무려 35개 국어를 공부해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소통하고 가르쳤다. 솔선수범이다.

안드리아 선생님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 빈민굴의 학교는 학업 성취도 개선과 관련 상위 5%에 진입하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여기서 배운 아이들은 범죄자가 아닌 각 분야에서 한 몫을 다 하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변모했다('따뜻한 하루'에서 인용). 이제 '브랜트'는 범죄인의 도시가 아니다. 한 여 선생님의 고행이 도시를 바꾼 것이다.

스님의 수행과 여 선생님의 노력, 어느 쪽이 더 ​힘들었을까. 이 혼탁한 세상, 외면하는 큰 스님과 헌신하는 여 선생님 중 누가 더 필요할까. 진정한 비움의 무소유와 순수한 봉사에 바탕한 사랑의 채움. 움켜잡으려 하면 할수록 소멸되고 가지려 하면 할수록 공허해지는 인생, 무엇으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답은 실천이다. 세상에 알려진 저명한 명예와 지위를 떠나!

황성철 칼럼니스트

*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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