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당'의 기반된 실제 일화 통해 조선시대 대표적 풍수지리 일화 알아본다

 

영화 '명당' 스틸컷. 사진=메가박스 플러스엠, 네이버 영화

[일간투데이 정우교 기자] 배우 조승우-지성 주연의 영화 '명당'은 '묏자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소위 명당이라고 불리는 곳에 묏자리를 쓰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실제 풍수지리 사상과 역사, 그리고 감독·작가가 만든 픽션(Fiction)이 결합됐다. 

'풍수'라는 말은 중국 동진의 곽박이 쓴 '장서'(葬書)의 한 부분인 「죽은 사람은 생기에 의지하여야 하는데…그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져버리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 그래서 바람과 물을 이용하여 기를 얻는 법술을 풍수라 일컫게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시작됐다.  

사실 대부분의 사극영화가 그렇듯, 명당의 결말도 얼추 예상된다. 마지막 예고편을 보면 '흥선'역을 맡은 지성이 "이제 이 터는 내가 가져야겠어!"라고 외치는 장면만 보더라도 그가 후에 어떤 이의 아버지가 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흥선이 언급한 "이 터"는 2대에 걸쳐 천자(왕)가 나온다는 명당으로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고 불리는 땅이다. 충남 예산군 가야산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실제로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여기로 이장했다. 

'상갓집 개'라고 불리던 몰락한 왕족, 흥선군이 자신의 아버지 묘를 이장하자 아들이 훗날 고종이되고 고종의 아들이 순종이 된 것이다.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는 신기하게도 맞아 떨어졌다.    

풍수지리 사상은 꽤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명당'의 배경인 조선 헌종 시절을 기준으로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초기,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과정에도 '풍수지리'는 밀접하게 논의됐다.  

 

한양천도 관련 조선왕조실록 원본. 사진=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0일 을유 1번째 기사'를 살펴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삼사 좌복야 영서운관사(三司左僕射領書雲觀事) 권중화(權仲和)가 새 도읍의 종묘(宗廟)·사직(社稷)·궁전(宮殿)·조시(朝市)를 만들 지세(地勢)의 그림을 바치니, 서운관(書雲觀)과 풍수학인(風水學人) 이양달(李陽達)·배상충(裵尙忠) 등에게 명하여 지면(地面)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후략)」
 
위의 말을 쉽게 풀자면, 태조가 "풍수에 능통한 신하들에게 새 도읍지가 적당한지 분석하라"는 뜻이다. 이때 도읍 후보지는 계룡산이었다. 하지만 계룡산으로 옮기겠다는 계획은 취소됐다. 경기 좌·우도관찰사 하륜이 역시 풍수지리설을 이유로 들어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음 후보지는 무악이었다. 무악은 현재 신촌 부근이다. 하지만 이곳도 논의 결과 '좁다'는 이유로 취소됐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0월 25일 신묘 1번째 기사에 따르면 태조는 드디어 고르고 골라 한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당시 기록은 아래와 같다.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와 '한양천도(漢陽遷都)' 이외에도 500년간 조선에서는 풍수지리사상으로 인해 궁을 보수하거나 능을 만드는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조선의 역사와 풍수지리사상은 밀접하게 흘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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