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7월 31일 군대 강제해산 명령과 순국지사 '박승환', 그리고 남대문 전투

[일간투데이 정우교 기자]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다. 올해는 건군 70주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고 뜻깊은 행사들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군의 날은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이 북한군을 상대로 반격한 10월 1일을 기념해 1956년부터 제정됐다. 

국군의 날을 맞아 지금부터 우리 군(軍)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111년 전 우리 군대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기록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7월 31일 양력 1번째 기사 - 군대 해산 관련 기록. 사진=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조서를 내려 군대를 해산하다

시작은 일본이었다. 1907년 순종이 등극한 해 일본은 정미칠조약을 강요했다. 정미칠조약은 일본이 한국을 본격적으로 강점하기 위해 체결한 불평등한 조약으로 7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대 해산은 이 강제조약을 바탕으로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7년 7월 31일, 조선왕조실록 중 순종실록 1권은 이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후략)」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統監)에게 의뢰하라.」

비용의 절감을 군대를 해산하는 이유로 들었지만 엄연한 강제적인 해산이었다. 여기서 통감(統監)이라고 하는 곳은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따라 일본에 의해 직접 설치된 기관이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6일 양력 1번째 기사 - 정미칠적 승진 관련 기록. 사진=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 군인들의 저항, 대한제국 참령 '박승환'과 남대문 전투 

군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는 대한제국군의 저항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서울 시가전, 일명 '남대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대한제국 참령 '박승환'이다. 미스터션샤인에서 군대 강제해산을 다뤘을 때 실존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대한제국 참령으로 시위연대 제1대대장이었고 고종의 복위 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박승환은 이후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와 함께 말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고 자부심이었다. 

박승환의 자살소식은 많은 군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남대문 전투는 시작됐고 이 사건은 지난 16일 방송된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22회 후반부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극 중 인물인 '장승구'가 고종 앞에서 "역적이 되겠다"며 싸울 것을 다짐하는 장면, 젊은 군인들이 해산명령에 저항하며 마침내 의병이 되는 장면 등 이날 방송은 실제 있었던 사건과 작가가 만든 픽션(Fiction)을 절묘하고 애절하게 묘사한 한 회였다. 아쉽게도 남대문 전투가 벌어진 8월 1일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 이후에도 군인 '박승환'의 이름과 쓰러져간 대한제국군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군대 해산에 앞장섰던 군부대신 이병무가 승진했다는 기록은 남대문 전투 5일 후인 8월 6일에 남아 있었다. 이를 순종에게 청(請)한 사람은 이완용이었고 함께 승진한 사람들은 임선준, 조중응, 송병준…모두 정미칠적(정미7조약에 찬성한 7명의 친일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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