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학자들의 반대 상소문과 훈민정음 반포 당시 기록들

훈민정음 창제 당시 기록. 사진=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일간투데이 정우교 기자] 1446년 음력 9월(조선왕조실록), 우리 글인 '훈민정음'이 반포됐다. 중국 한자를 빌어 문자를 주고 받았던 시대,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글자의 등장을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1443년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 102권에는 1443년 12월 30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 (중략) …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여기서 '이어(俚語)'는 표준어가 아닌 언어를 가리킨다. 전환(轉換)은 바꾼다는 의미. 그러니까 한글은 말과 소리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글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글자를 환영하지 않았다. 반대의 입장도 분명 존재했다. 

■ 세종대왕이 설치한 집현전, 그곳의 학자들은 반대했다 

1444년, 최만리, 신석조, 김문 등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이 창제한 언문에 대해 상소문을 올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글자는 대국을 섬기는데 흠결이라는 것이다. 글을 익히는 것은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습득하고 익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최만리 등의 상소문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대주의(강한 국가 및 세력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주의)적인 성격으로 새로운 언문을 단순한 ‘기예’로 표현했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이들은 또한 새로운 글자는 현실에 필요하지 않으며 언문을 만드는 중요한 일을 성급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은 이 상소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고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을 의금부에 가뒀다가 이튿날 석방했다고 한다. 이중 김문은 찬성했다가 반대했다는 이유로 장형 100대를 내렸다. 

최만리를 비롯한 훈민정음을 반대한 학자들의 상소를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충언이었을까. 단순한 학자들의 이견(異見)이었던 것일까. 혹은 그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유학자가 가졌던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까. 

 

훈민정음 반포 당시 기록. 사진=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세종이 설치한 집현전, 그곳에서 대표급이었던 최만리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1446년 훈민정음은 반포됐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유는 ‘백성’을 위함이었다. 세종의 의도는 세종실록 113권<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 기사>에 잘 나와 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후략)」

이렇게 만들어진 글자는 '쉬웠다'. 해당 기록을 살펴보면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라고 나와 있다. 한자와 비교하더라도 쉽게 이 소리들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 전후로 '사서', '운회'등 고서를 번역하게 했다고 한다. 반포 후에는 관리 선발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겠다는 지시도 내렸다고 전해졌다. 

왕이 만들었고 반포했다고해서 역사가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았다. 학자들의 반대, 그리고 뜨거운 논쟁, 점차적인 확대를 거쳐 한글은 570여년의 역사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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