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전봉건

▲ 전봉건 시인.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에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 먹어요.


불빛 아래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고요한 자리
잔에는 포도주를 따르지요
오 아니에요.
우리가 둘이서 잔에 따르는
이 포도주는 포도주가 아니라 꿈의 즙
우리는 진한 꿈의 즙을 가득히
잔에 따라 마셔요.

나는
당신 앞에 당신은
내 앞에
둘이서만 만난 둘만의 자리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오 배가 불러요
보세요
우리가 정결한 저를 들어
생선의 꼬리만 건들어도
당신과 내 안에 들어와서 출렁이는
이렇게 커다란 바다 하나를.

​■출처 : '전봉건 시전집' 문학동네(2008)

▲시인은 무엇으로 시를 쓰는가? "훌륭한 시는 강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워즈워스의 지론대로 시인은 감정이 충만할 때 시를 쓰게 된다. 특히 충만한 사랑의 감정은 모든 이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하는 면이 있다. 사랑은 정서의 저수지에 물을 채워 온 세상을 빛나게 하고, 상상력의 용광로에 불을 지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으로 자극된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시적 표현의 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훌륭한 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시는 그런 사랑의 감정과 상상력에 시적 표현미까지 더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둘이서만 만난 자리'에서 한껏 고양된 사랑의 감정은 가난한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고 확대하여 그 낭만성을 극대화한다. 그리하여 '쨈'이 '과수원'이 되고, '포도주'가 '꿈의 즙'으로 변하고, '생선의 꼬리만 건들어도' '당신과 내 안에'에 '바다'가 '출렁'이게 된다. 이런 표현들은 일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고와 논리로서 사랑에 빠진 남녀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연인끼리 나누는 식사란 무슨 '코스 요리'가 아니라 '둘이서만 만난 둘만의 자리'라는 사실, 그 사랑이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사랑은 진실로 사람을 "사람답게 느끼고 생각하고 꿈도 꾸면서 살아"(전봉건, '단상(斷想)'에서)가도록 하는 삶의 원동력이자 목표일 것이다.

■전봉건(全鳳健)
△1928년 평남 안주 출생, 1988년 영면.
△평양 숭인중학교 졸업 후 월남.
△1950년'문예'에 시 '원(願)' '사월(四月)' '축도(祝禱)' 등 미당과 영랑의 추천으로 등단.
△'예술시보' '문학춘추' 등 편집 실무, '현대시학' 창간 및 주간, 자유문협 상임위원, 문총 중앙위원, 한국시인협회 간사 및 중앙위원 역임.
△제3회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시집 : '사랑을 위한 되풀이' '춘향연가' '속의 바다' '북의 고향' '돌' '트럼펫 천사' '기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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