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또 다른 길- 물길과 철길<1>

땅위 이곳저곳에서 도로가 건설되는 동안,바다에도 길이 하나 둘 만들어지고 있었다. 배는 바다 위 아무 데나 항해하면 되는 것 같지만 초기 탐험가들에 의해 지형, 수심 등을 고려한 안전하고 정확한 항로가 개척돼 지도에 새겨짐으로써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 번 항해를 나가면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바다에서 보내야 하는 외롭고 험한 날들이었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모험과 도전의식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노를 저어 나갈 수 있었으리라.

바닷길을 개척한 사람으로는 우선 콜럼버스를 꼽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아메리카를 최초로 발견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지원으로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대서양을 돌아가기로 했다. 결국 인도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또한 유럽 국가의 신대륙 식민지 경영의 발단도 되었다. 이 때문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과 서양인들에게는 개척정신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을 파괴하고 열강들의 식민지 지배를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의 화살을 맞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콜럼버스보다 500년이나 앞서 북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이킹’들이다. 바이킹은 8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거점으로 삼아 유럽 각국에서 활동했던 노르만인을 가리킨다. 원래 바이킹은 ‘강가민족’, ‘시장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상업에 종사하는 이외에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해적’을 의미하는 이름이 돼버렸다. 그들이 이용했던 배는 길이30m, 폭5m 정도 크기에 50명 가량이 탈 수 있는 것이었는데 순풍일 때는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까지 9일 동안에, 북해는 해도나 나침반 없이도 3일 만에 횡단했다고 한다.

이들이 콜럼보스보다 일찍 북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북구에서 전해오는 시인 이른바 <사가>에 따르면, 1000년경 노르만인 레이후 에릭슨이 30여 명의 동료와 함께 그린랜드에서 남하해 계속 육지를 발견한 후 제각기 헤릴랜드(돌의 나라), 마르크랜드(숲의나라), 빈랜드(포도주의 나라)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바이킹 시대가 끝나면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

그러다가 근래에 들어 연구가 진척되면서 그린랜드의 노르만 식민지가 발굴됐고, 나아가 위의 발견지는 각각 라브라돌, 노바스코시아, 뉴잉글랜드로 추정되기에 이르렀다.

바닷길을 연 사람으로는 마젤란을 빼놓을 수 없다. 포르투갈에서 태어났지만 에스파냐로 건너간 마젤란은 최초로 지구를 일주한 항해자로 기록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항해를 시작한 건 1519년 8월 10일. 서항로로 몰루카 제도에 갈 계획으로 선박5척에 승무원 270명을 태우고 세비야를 출발했다.

그는 승무원들에게 행선지를 감춘 채 항해를 계속한 끝에 12월 중순에 현재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이듬해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흐르는 라플라타 강에 도착해서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했다. 다시 남하를 계속해서 15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를 ‘마젤란 해협’이라 명하고 새로운 바다를 ‘태평양’ 이라고 이름붙였다.

운좋게도 40일 동안 풍랑 없이 잔잔한 바다에서 평화롭고 태평스러운 항해를 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작다고 예상하고 계속 서쪽으로 나갔지만 결과는 3개월 이상 걸리는 대항해였다.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통솔해서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지만 한동안은 어떠한 섬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521년 3월 6일, 괌에 도착했다. 또 3월 16일엔 현재의 필리핀 군도 즈르안 섬에 도착해서 같이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4월 27일 맥탄 섬을 토벌하러 갔다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그후 필리핀을 점령한 미국이 이 섬에 ‘마젤란의 죽음’ 이라는 이름이 붙은 간판 하나를 세웠다. 거기엔 ‘1521년 4월27일, 이 땅에서 마젤란은 맥탄 섬의 수장 라프라프 군대와 전투를 하다 부상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그후 독립을 맞은 필리핀공화국은 이 간판 옆에 나란히 제2의 간판을 세웠다.

‘라프라프’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간판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1521년 4월 27일’ 라프라프와 그 부하들은 스페인의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그 지휘관 마젤란을 처치했다. 라프라프는 유럽의 침략자를 내쫓은 최초의 필리핀인이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콜럼버스나 마젤란 등이 활약한 15세기에서 16세기의 대항해시대, 당시 뱃사람들의 선박여행은 어떤 형태였을까? 한마디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배 안에서 독립된 방을 가질 수 있는 건 선장뿐이었고 , 일반선원은 침대도 없이 적당한 장소에서 아무렇게나 잠을 자는 게 보통이었다. 식사는 소금에 절인 고기와 비스켓 정도였는데, 몇 달 동안 이런 식사를 계속하면 거의가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한다. 특히 선원들을 힘들게 했던 건 비타민C 부족에서 오는 괴혈병이었다.

심지어 이 병으로 목숨을 잃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언제 해적떼의 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도 심각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의 범선은 파도에 약해서 작은 태풍에도 여지없이 부서질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바닷길 개척자로는 단연 해상왕 장보고를 꼽을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남 완도의 가난한 어민 출신이었던 그는 소년시절부터 무예에 능숙했을 뿐 아니라 수영과 자맥질도 잘했다고 한다.

가난에서 벗어나 이른바 출세하고 싶었던 소년 장보고는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수련을 쌓은후 청년이되자 군대에 입대했다. 뛰어난 무예와 총명함으로 ‘무녕군 중소장’ 이라는 벼슬을 받고 장군으로 출세했지만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처우를 보고 분개한 나머지 사직하고 귀국했다.

그는 신라사람들을 잡아다가 당나라에 노예로 파는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하기 위해서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한 후 해적을 완전히 소탕했다. 그후엔 일본에 무역사절을 보내고, 당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한. 중. 일 삼각무역을 했다. 서남해지역이 바야흐로 국제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부터였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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