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또 다른 길- 물길과 철길<3>

바닷길 이야기가 나오니, 새삼 떠오르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아프리카 케냐의 파테이 라는 작은 섬에 가면 케냐 본토인들보다 밝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들어보면 이들에겐 중국 사람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정설은 아니지만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때보다 수십 년 앞서 중국인 원정대가 아프리카까지 항해했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

실제로 이 섬에는 오래전, 중국에서 온 배가 난파했으며 그때 살아남은 선원들이 이곳의 원주민과 혼인해 후손을 남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름 넉자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대탐험가 콜럼버스보다 한 발 빨랐던 이 위대한 인물은 중국 명나라 때 항해가인 정허(1371-1435)라는 사람이다.

정허는 이슬람교도이자 역적의 자식으로 어린 시절 거세당한 환관 출신이다. 중국 남부 윈난성에서 태어난 그는 한족이 아니라 회족(한족에 동화된 이슬람교도)이었다. 그가 열한 살 때 명나라 군대가 윈난성에 침입했는데 그때 포로가 된 그는 궁형(생식기를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말았다.하지만 정허는 타고난 총명함과 강한 의지로 나중에 성조로 개명을 하는 영락제를 도와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 환관의 우두머리격인 태감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 정허가 항해가로 대원정길에 오르게 된 건 그를 무척이나 아꼈던 영락제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정허는 1405년부터 1433년 사이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일곱 차례의 원정에 나섰다. 300척의 배, 2만 8,000명의 선원으로 이루어진 함대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규모였다. 선단 중 가장 큰 배는 길이가151m, 폭61m로 지금의 축구장 크기와 비슷했으며, 바다에서 3개월을 버틸 수 있는 규모였다.

당시 기록에 ‘눈처럼 하얀 정허의 원정선 수백 척이 바다를 뒤덮으면 수평선이 안 보일 정도였다’는 묘사가 있을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했다. 1492년, 항해를 떠났던 콜럼버스의 선단이 배 3척, 선원 90 명 규모에 배 길이는 23m에 불과했다는 것과도 비교된다. 정허의 선단이 항해한 거리만도 장장 18만 5,000km에 달하는데 이는 지구를 4바퀴 반 돌 수 있는 거리다.

또 그의 발길이 닿은 나라만도 무려 37개 국이었다. 정허는 콜럼버스보다 50여 년 앞서 동아프리카에 도착했고 아랍 상인들을 통해 유럽의 존재도 알았다. 또한 영국의 해군장교 출신인 개빈 멘지스는 2002년에 ‘정허의 함대가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선 1421년에 아메리카 를 발견했다’ 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14년 동안 140개국, 900곳의 문서보관소와 도서관, 박물관 등을 뒤지며 연구한 결과였다.

멘지스에 따르면 정허는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세계를 일주했고 , 바스코 다 가마보다 80년 이상 빨리 인도양을 항해했으며, 쿡 선장보다 300년 먼저 호주에 첫발을 디뎠고, 남극과 북극은 최초의 유럽인보다 400년 앞서 탐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이 세계 학계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많은 학자들이 당시 중국의 항해기술이 선진적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정허의 원정은 나갈때마다 2, 3년은 족히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배에 비단과 자기, 금, 은을 가득 싣고 베트남과 스리랑카, 필리핀, 인도 등 30여 나라를 돌며 물건을 팔고 대신 기린과 코끼리, 타조 같은 동물과 후추, 진주 등을 중국에 들여왔다. 지금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연안 국가에는 정허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같은 정허의 탐험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중국인이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곳곳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동남아 화교의 역사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정허는 각국의 외교사절단을 중국으로 데려와 경제. 문화 교류의 꽃을 피우는 역할도 했다니 뛰어난 외교전략가로서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유럽을 압도했던 중국의 항해술과 탐험문화는 1424년에 정허를 총애했던 성조의 죽음과 함께 말살되고 말았다.

중국 조정을 장악한 유학자 관리들이 일체의 항해와 배의 건조를 막은 것은 물론 당시 3,500척에 이르던 배까지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간 정허는 훗날 중국보다 서양에서 더 일찌감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아직도 중국인들 가운데는 정허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반면 미국의 시사월간지<라이프(LIFE)>가 선정한 ‘지난 1천 년의 세계사를 만든 100대 인물’에서 정허는 동양인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14위)를 차지했다. 지난 1999년 말에 <뉴욕타임스>에서는 정허를 동서교류의 상징적 인물로 꼽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 중국에서 ‘정허’ 열풍이 불고 있다. 마침 2005년 7월 11일은 정허가 첫 출항한 지 꼭 6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중국 정부는 이 날을 ‘항해의날’ 로 정하고 각종 행사를 준비했다. 세계 각국의 전문가를 초청해 국제학술포럼을 개최했는가 하면 정허가 사용했던 대형선박과 관련 그림, 사진, 지도 등을 선보이는 전시회도 열었다. 국영CCTV는 특집방송을 방영했고, 기념 우표와 주화도 발행했다.

이렇게 정허가 중국 내에서 부각되기 시작하자, 중국의 한 온라인게임업체는 정허의 대항해를 배경으로 한 게임<항해세기>를 출시해 세계 시장을 공략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정허 띄우기’의 배경에는 현재 해외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는 중국의 전략이 있다. 대외적으로 당시 명나라의 선진문물과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항해술을 알림으로써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인도양을 침략해서 약탈과 살인을 저지른 유럽인들과는 달리 이미 15세기에 세계 대양을 누비고도 어떤 나라도 식민지화하지 않았던 정허의 업적이 곧 오늘날 평화적으로 세계무대에 서겠다는 중국의 대외정책임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600년 만에 부활한 정허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거대한 배와 선원들을 이끌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유럽 중심의 탐험 역사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긴 정허의 위대한 업적은 한 발 앞선 개척정신에서 시작되었다. 비단 정허의 경우만 그러하랴.

오늘날 선진국의 대열에 서있는 대부분의 나라는 일찍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향해 떠났다. 길 속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북아 물류중심을 부르짖고 있는 우리도 장보고와 같은 위대한 개척자, 무역의 선구자를 부상시켜봄이 어떨까. 위인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후대에 의해 받들어지는 것이기에.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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