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또 다른 길···물길과 철길<4>

도로는 이민족의 침입을 돕는 근심거리라 해서 육로를 개척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던 우리민족, 그렇지만 뱃길은 꽤 오래전부터 개척해온 것으로 보인다. 처음의 발자취는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과 인접한 고조선은 초기부터 중국과 교역을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또 구석기시대인 기원전 1만 년경부터는 일본과도 교역하기 시작했다고한다. 그런데 이때는 빙하기로 한국과 일본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상남도 해안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말의 융기 문토기와 매우 흡사한 것이 일본 쓰시마 섬에서 출토된 것을 그 증거로 삼기도 한다.

신석기시대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해수가 불어나 우리나라와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갈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고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이어진다. 고조선 사람들이 일찍이 해상교통을 개척한 덕분이었다.

고대의 기록에 의하면 돛 달린 범선이 등장하는 것은 6세기에 와서였다. 그렇다면 고조선 사람들은 무얼 타고 일본을 오갔을까. 통나무배나 뗏목 같은 원시적인 배로는 큰 파도와 폭풍우 치는 험한 바닷길을 건너기란 불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실제로 고구려 말까지 일본을 오가는 해상교통은 노를 젓는 작은 배였다. 이 배로 바닷길을 오갈 수 있었던 건 해류의 흐름을 이용하는 항해법을 알았기 때문었다. 항해길에 나침반이 이용되기 훨씬 전이었던 당시, 고조선 사람들은 바다에서 일정하게 흐르는 해류와 섬들의 모양을 인지해 항해하는 법을 개척했다.

이 해류는 쿠로시오라고 부르는 흑조 난류와 한류다. 흑조는 적도에서 형성된 따뜻한 해류가 지구의 양극을 향해 흐르는 성질이있고, 한류는 양극에서 형성된 차가운 해류가 적도를 향해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해류의 흐름을 이용해 작은 배나 뗏목으로 일본을 오갔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 사람들은 한반도로 들어올 때 쓰시마(대마도)와 큐슈에서 주로 떠났다. 여기서 배를 띄우면 한반도 쪽으로 북상하는 흑조를 활용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뗏목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 년경부터라고 전해진다. 이런 뗏목은 지금도 압록강이나 남한강에서 종종 볼 수 있으니, 그 역사가 얼마나 장구한가.

우리말에 ‘떼돈 번다’ 는 말이 있다. 이 말 역시 뗏목에서 비롯된 말이다.

강원도 정선의 아우라지강엔 예로부터 태백과 오대산에서 베어낸 나무가 흘러내려온 것들이 많았다. 이 나무들은 뗏목을 만드는 재료가됐다. 이런 뗏목을 만들었던 뗏꾼들이 가장 큰 돈을 벌었던 때는 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였다.

서울에 도착한 뗏목들은 비싼 값에 팔려 이렇게 떼를 팔아 번 돈을 ‘떼돈’이라고 했다. 한 번 서울에 갔다오면 당시 황소 서너 마리를 살 정도의 큰 돈을 만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떼돈’ 을 번 셈이다. 그런데 뗏꾼들은 이렇게 큰 돈을 벌어도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빈털터리였다고 한다.

강가의 주막집에서 유희에 빠져 그 돈을 다 날리고 또 다시 뗏목을 타는 힘겨운 삶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고조선시대부터 해상교통로를 개척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그 노력이 그치지 않았다. 우선 고구려를 보면 3세기 초까지는 배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까지는 국토가 만주대륙의 일부였기 때문에 바다와 인접해있지 않은 데다 강과 하천만 분포되어 배가 발달할만한 환경이 못되었다.

해상교통이 개척되기 시작한 건 국토가 급속하게 확장되던 3세기 중엽, 황해와 동해 북부가 국토로 연결되면서부터였다. 고구려의 해상활동에 대한 첫 기록은 뜻밖에도 <삼국지> 의<오주전>에서 볼 수 있다.

233년 3월, 양쯔강 하류에 있던 오나라가 요서와 요동에 있던 공손씨 세력과 동맹을 맺으려고 서해를 통해 귀국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구려는 한반도 이남의 백제와 가야를 공격하는 데도 해로를 이용했다. 또 5세기 초에는 요동반도 해역인 발해만과 한반도 서해를 거쳐 제주도에 이르는 해로를 장악해 일본까지 왕래했다.

백제의 경우는 4세기가 전성기로 국토가 가장 넓었다. 임진강,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등 넓고 긴 강들이 고구려나 신라보다 많아 해상교통이 가장발달했다. 이 강들은 화물을 내륙 수도로 옮기거나 무역을 위해 해안으로 운반하는데 이용됐다.

내륙의 수상교통 발달은 서남해를 통해 탐라국(제주도), 일본, 중국과 해상교역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를 보면 372년부터 621년까지 서해를 건너 중국에 조공을바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백제가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바닷길을 선택한 것은 고구려가 육로를 막았기 때문이다. 초기부터 바다로 진출했던 백제는 배 만드는 기술도 무척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강대국을 이루게 된 데는 다양한 육상교통로와 해로를 개척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6세기까지는 백제의 해상교통이 가장 발달했지만 그 이후엔 신라의 해상교통과 무역이 가장 발달했다. 7세기 들어 삼국을 통일하면서 당나라와 일본, 신라를 연결하는 해상교통과 함께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해상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해상왕 장보고가 탄생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한강과 낙동강, 섬진강 같은 강을 수상운수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신라가 가진 경쟁력이었다. 또한 선박의 제조기술이 무척 발달해서 섬나라 일본이 배 만드는 기술을 한 수 배워 갈 정도였다 하니, 오늘날 조선강국의 위상은 이때부터 키워져온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내륙수상교통이 발달했는데, 백성이 국가에 바치는 세금인 세곡미를 거둬들이기 위해 국가가 강제적으로 운영하던 조운에 힘입어서였다. 국가에 바치는 세금을 곡물로 대신했던 고려는 많은 세곡미를 육상으로 운반하는 것보다 강이나 바다로 수송하는 것이 더 빠르고 안전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상인들도 바닷길을 이용해 무역을 했다. 육로에 보부상이 있었다면 해상에는 선상이 있었던 셈이다. 강을 이용하면 물건을 순식간에 빠르게 운송할 수 있어 선상무역은 활기를 띠었다.

또한 고려는 934년 중국의 송나라와 해상교역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후 송나라와의 교역이 더욱 발달해 1012년부터는 송과의 본격적인 민간교역도 이루어졌다. <고려사> 에 보면 전성기였던 1278년까지 송나라 무역선이 126회나 고려에 왔다는 것과 매회 평균 50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려는 초창기부터 오월, 남한 등의 남중국 나라들은 물론, 멀리 인도양까지 나가 아랍과도 교역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는 나루터가 발달했다. 주요 간선도로가 통과하는 한강에는 광나루, 삼발나루, 서빙고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 삼개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등이 있었다. 한강의 양쪽 나루터를 오가며 사람을 건네주고 물자를 운반해 주는 나룻배는 조선시대 최대의 교통편의 시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루는 규모에 따라 넓응 강에 있는 건 ‘도’, 이보다 좁은 강에 있는 건 ‘진’이라고 구문했다. 양화도의 ‘도’, 노량진 의 ‘진’ 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지역간의 원거리 교통이나 교역은 18세기까지는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왜구와 몽골의 침입,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적의 침략과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조선의 민간경제가 자급자족적인 구조로 변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려시대 이래로 운영해온 조운이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수상교통체계였다.

국가의 소유인 관선 중심의 조운제도를 정비하면서 배를 움직이는 선원인 조군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했다. 조군은 거의 세습적으로 이 일에 종사했는데, 천민 대우를 받은 데다 노동강도가 혹독해 도망하여 유랑하는 경우가 잦았다. 또 다른 어려움은 조운선이 침몰하는 해난사고였다. 험난한 해로의 악조건을 극복할 정도로 항해술이 뛰어나지 못했기에 침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이는 국가 재정에 막대한 손실로 작용했다.

조정에서는 조난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운항지침을 강화하고 항로를 철저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배의 건조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조선전기에는 병선보다 조운선 제작에 치중했는데 선박의 수명이나 관리도 법으로 정했다. 건조한 후 8년 후에 수리하고, 다시 6년 후에 수리하며, 6년 후엔 개조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안전관리에도 철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 나가서 싸울 병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거북선도 이때 나온 ‘명품’ 이다. 국가의 조운제도 정비와 함께 민간업자들이 주도하는 사선조운도 점차 발달했다. 다시 말해 개인이 선박영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의 뿌리는 고려시대 민간 수운업자들이 세곡 운송에 참여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배와 사공인 조군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위험이 크고 온갖 잡역에 동원되는 조군은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공역인데도 무상으로 동원되곤 했으니 이런 고통을 이기지 못한 조군들이 공역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또한 배의 건조작업도 어려워졌다.

조선작업에 강제로 동원된 기술자들은 고되고 대접도 못 받는 관청기술자가 되는 걸 슬슬 피하기 시작했고,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조운제도는 17세기에 이르러 파탄지경에 처한다. 기술자를 제대로 육성하지 않고 대접하지 않으면 결국 어떤 결과가 닥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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