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대 명예교수·시인
그러나 신문이 아니고 성당이나 교회당 사찰 뿐 아니라 심지어 지하철에서 하나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치는 신도의 마음속에서까지도 신문 36면 모두가 하나님 손바닥 안에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법을 다루는 법관은 사물을 어디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시점부터 점검해야 한다.
■ 승군 조직해 왜군과 싸운 사명대사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될 수도 있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서 양심의 문제로 돌아가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심이란 인간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본성이다. 양심 없는 사람은 없다. 양심이 있는 이상 누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겠는가. 사람 죽이기 싫어도 더 큰 문제가 있으면 그 큰 문제를 위해서 괴로움을 견디며 감내하는 것이다. 자기 편하자고 국토방위의무라는 큰 문제, 그 큰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것은 양심 이전에 사람다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살생을 금하는 승려의 몸인 데에도 승군을 조직해 왜군을 무찌르지 않았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기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땅을 피흘려 지켜낸 선지선열들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은보은(知恩報恩)을 상기하게 된다. 상식이란 시대와 지역, 환경에 따라서 변한다. 천주교, 순교자 중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순교당한 이도 있다. 유정(사명당)은 부모를 여의고 삼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제사나 시묘살이가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교리에 얽매어 총을 잡지 않는 행위도 절대적인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가령 북한군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가족을 모두 잃게 돼도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일본인들은 에도시대 유학의 수용을 통해서 발전시켰던 의무감이라든지, 명예의식, 의리 같은 것으로 집단을 중요시했는데 우리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일본의 석학 마루야먀 마사오(丸山眞男)의 지론대로 일본의 정치가나 경제인들은 자기 회사나 국가와 같은 집단을 위해 죽어간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일본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추신구라(忠臣藏)'만 봐도 그렇다.
■ 양심적 병역거부 '비양심적' 여지가
1704년 에도시대에 아코성의 성주 아사노 나가노리는 참근교대제도에 따라 자기 성을 떠나 쇼군 사는 에도에 있었다. 아사노는 막부 고관인 기라 요시나카의 지휘 아래 있었으나, 기라와의 의견충돌 끝에 기라에게 상처를 입히게 됐다. 그 당시 법에 따라 성안에서 칼을 뽑은 무사는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억울하게 할복해 죽는다.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비롯한 아사노의 부하들은 주군을 잃고 일자리도 없는 낭인이 됐다. 그들은 주군의 복수를 맹세한 뒤 때를 기다리다가 복수하게 된다. 주군을 죽게 한 기라의 목을 베어 주군의 무덤 앞에 바치고 향을 피운다. 그리고 나서 47인의 사무라이들 역시 막부의 명령을 받고 모두 할복해 죽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양심적 병역거부는 바로 비양심적 병역거부라 하겠다. 하루 동안에 할복하고 죽은 47명의 충신들은 양심이 없어서 칼을 들었겠는가? 그러므로 종교인의 병역거부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니라 비양심적 병역거부라 하겠다. 만일 병역을 거부한 종교인들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라 한다면, 불교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스스로 칼을 잡은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는 비양심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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