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도종환

▲ 도종환 시인.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맨발을 가만가만 적시는 여울물 소리
풀잎 위로 뛰어내리는 빗방울 소리에 끌려
토란잎을 머리에 쓰고 달려가던
맑은 귀를 가진 시인 잃어버리고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소리에 묻혀 사는가
바알갛게 물든 감잎 하나 못 버리고
책갈피에 소중하게 끼워두던 고운 사람
의롭지 않은 이가 내미는 손은 잡지 않고
산과 들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 몰라라 하고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거라는데
지팡이로 세상을 짚어가는 눈먼 이의
언 손 위에 가만히 제 장갑을 벗어놓고 와도
손이 따뜻하던 착한 시인 외면하고
나는 어떤 이를 내 가슴속에 데려다놓은 것일까


​■출처 : '해인으로 가는 길', 문학동네(2006).

▲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한 프로이트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시를 짓는 기관'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각자 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서 이 세상에서 인류가 멸망하는 날 마지막 시인도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도종환 시인은 프로이트의 이러한 말을 염두에 두고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라고 자문하고 있다. 그런데 시를 조금만 더 읽어보아도 그 자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통회라는 걸 알 수 있다. 시인은 왜 통회를 할까? 한마디로 순수의 세계를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시인이 떠나보냈다고 통회하는 그 시인은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 눈빛 여린 시인"이다. 또 '맑은 귀를 가진 시인'이며,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이다. 시인은 이러한 자기 안의 시인을 그냥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스스로 떠나보냈다고 자책하면서 다시 또 물음을 깊여 가고 있다.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그러면서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 남아 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거라는데"라고 프로이트를 곱씹으며 역설로서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있다. 존재해야 할 존재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말아야 할 존재만 살아남아 세상을 좀 더 춥게 만드는 건 아닐까? 스스로 경계하는 시인의 마음의 손이 아직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 마음이 이와 같은 시를 짓는 것이리라.

■도종환

△1955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
△1984년 동인지'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당선으로 등단.
△충북대 국어교육과 학사, 충북대학원 국어교육학 석사, 충남대학원 문학박사.
△덕산중학교 교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제19대,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제20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 위원장 역임.
△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부문 올해의 예술상, 제21회 정지용문학상, 제5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제13회 백석문학상, 제20회 공초문학상, 제1회 신석정문학상, 법률소비자연맹 국회의원 헌정대상 수상.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몸은 비록 떠나지만'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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