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인류 역사를 보면 동서양 모두, 앞선 시대의 더 나은 문화와 문명 그리고 제도를 모방하면서 발전해왔다. 로마가 그리스를, 서양의 르네상스는 로마를, 근대 국가는 다시 르네상스를 모방했고 발전시켰다. 동양은 다시 서양의 것을 모방했다. 모방은 점잖게 번안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베낌이며 따라 하기다. 법적으로는 표절에 가깝다.

인간의 모방욕은 타고난 것으로, 인간은 타인을 모방하면서 배우고 그러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간다. 이러한 모방에 대해 창조성이 없다고 돌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수 지망생이 이미자나 파바로티를 모창하고, 서예 지망생이 추사 김정희를 모사하며, 작가 지망생이 벽초 홍명희나 세익스피어를 필사하듯, 롤 모델을 정성스럽게 모방하는 것은 모든 초보의 첫 걸음이다. 그래서 모방의 미덕은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하다 실패하고, 좇아가다 실수했던 과정 없이 현재의 자신의 것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결국 명필이 되려면 명필의 필법(필력, 필체, 필의)을 길러야 하고, 그것이 체화돼야 비로소 자신의 글씨를 쓸 수 있다.

■ 대한민국, 모방을 넘어 창조 거듭

모방은 표절과 구별된다. 모방은 숙성과정을 거치면서 떠오르는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남의 것을 단순히 그대로 가져다 쓰는 표절이나 베낌과 구별된다. 모방은 재창조된 나만의 것, 즉 창조적 모방으로 창조성이 결여된 표절과 다르다. 창조적 모방과 표절도 그 구분이 모호할 수 있지만, 그 구별기준은 ‘작가정신’, 즉 창조성의 존재여부이다. 작가의 정신이 존재할 때 모방의 독창성이 인정된다. 반면 표절은 창조적 정신이 결여된 진정성 없는 베끼기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은 1945년 해방이후 일본과 미국을 모방하며 국가사회를 발전시켰다. 법률용어로부터 일상생활의 음식과 심지어 조미료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모방하거나 일본이 모방한 것을 다시 모방했다. 당시의 모방은 솔직히 모방이라기보다는 복제요 베낌이었다. 1960~70년대에도 일본에 대한 모방은 계속 유지됐다. 이러한 모방을 자랑할 수 없지만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아니다. 성과를 빨리 내야하는 후발주자에게는 손쉽게 이뤄지는 모방은 불가피했고, 또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기에 부득이했다. 어려서 즐겨 읽던 철인이나 아톰이 일본만화였고, 중학생시절의 황금박쥐와 요괴인간이 모두 일본영화를 그대로 베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분이 참 묘했다. 우리는 서양을 직접 만나지 못한 채, 일본이 행한 모방을 다시 모방했기에 일본에 대한 모방이 특히 심했다.

대한민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전까지만 해도, 모방, 복제, 표절을 통해 선진문물을 차용하고 변형했다. 모방은 아무리 베껴도 원본을 넘기 어렵다. 모방의 존재론적 한계다. 모방을 재모방할 경우 독창성이 나오기 어려운데, 놀랍게도 다행히도 대한민국에겐 가능했다. 필자가 1995년 독일 교환교수시절, 쇼핑몰에서 삼성이나 대우의 전자제품은 진열대 뒤 쪽 끝에 위치했다. 그러다가 2002년 미국 교환교수시절에는 진열대 앞 쪽에 놓였는데, 그래도 일본제품에는 명백히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5~6년 지나서는 세계 어딜 가도 삼성과 LG가 주름잡고 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대한민국은 모방을 넘어 창조에 창조를 거듭했던 것이다.

■ 경제대국의 ‘베끼기’ 이젠 용납 안돼

우리의 모방은 제품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교육과 학문의 영역에도 적용됐다. 비판적 사고보다는 외국의 교육을 빨리 수용하고 이식해야 했고, 급하게 성과물을 내야했기에, ‘왜’라는 문제의식 없이 ‘어떻게’를 중히 여기는 조급한 교육환경이 만들어졌다. 모방에서는 원본과 얼마나 비슷한지가 기준이 되지 창의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경우 모방은 강조됐지만 일본과 달리 번역은 소홀이 취급됐다. 느리고 답답한 번역은 모방에 비해 신속성이 매우 떨어지기에 등한시되기 쉽다. 반면 끈질긴 일본은 번역의 고수가 되었고, 번역은 일본 근대화의 핵심이 됐다. 번역은 원문에 대한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국어로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창이어서 매우 중요하다. 일본은 지루하고 고된 번역작업을 통해 근대 서양어를 한자어로 만들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한자어, 특히 법률용어가 이 때 만들어졌다. 우리는 번역은 창조의 영역이 아니라 무시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장려돼야 한다.

지금과 같은 글로벌 사회에서는 과거에 용인됐던 표절이나 베끼기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어쩌면 지적재산권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기에 선진문화를 모방했던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서는 모방을 통한 단순 복제, 베끼기, 따라 하기는 더 이상 설 땅이 없어야 한다. 창조 또는 혁신만이 살 길이다.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