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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별 기고] "혁신은 개인의 에너지에서 나온다"이상용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한국인공지능법학회 회장
이상용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진=이상용 교수

얼마 전 뒤늦게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를 봤다. 감동의 눈물 끝에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근대화에 뒤쳐져 나라를 뺏기고 만 것일까. 

조선 말 우리나라 지도층 모두가 당파싸움과 사리사욕에 눈먼 무능한 사람들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자신과 세상을 다스리는 법[修身齊家治國平天下]을 배워온 이들에게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마음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드라마에서도 조선 제일의 명문 양반가 규수가 자신이 가진 신분의 특혜를 버리고 일반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뺏기지 않기 위해 의병운동을 전개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국가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의 기본이 되는 사람과 자원을 조직해 그 역량에 맞게 역할과 임무를 배분하는 일을 오로지 국가만 맡았다는 점이다. 조선 사회에서 개인은 국가[國王]에 봉사하고 충성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부담하는 보조자에 불과했다. 이 점은 '서양을 배척하자'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은 물론 '동양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배우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도 마찬가지였다. 

바다 건너 일본은 달랐다. 일본 또한 처음에는 우리의 위정척사론이나 동도서기론처럼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과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이 득세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분제 족쇄에서 풀려난 개인들이 창의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펼치면서 경제 조직을 재구성한 결과 급속한 근대화 열차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 

서양의 새로운 기술을 발 빠르게 받아들여 큰 기업을 일군 기업가(企業家)들 중에는 과거 천대받던 상인(죠닌·町人)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배층인 옛 사무라이 출신들이었다. 기업가라는 단어 자체가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의 이윤추구 활동이 국가를 위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낸 말[造語]이었다. 

우리나라도 고종이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시도하며 늦게나마 개인들의 힘을 끌어내려 애썼지만 이미 제국주의 광풍이 세계를 뒤덮은 뒤였다. 청나라 역시 청일전쟁 패전 이후 중체서용(中體西用)을 강조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한계를 절감하고 변법자강운동(變法自疆運動)을 통해 정치·경제의 근본적 변화를 꾀했지만 결국 때를 놓쳐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웬 역사 이야기가 이렇게 장황한가' 싶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 최대 화두가 되고 있는 4차산업혁명을 파고들수록 우리 조상들의 선택이 현재의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돼 자꾸만 지나간 역사를 곱씹게 된다.

모름지기 산업혁명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혁신에 있고 혁신의 동인(動因)은 개인의 자율과 창의에 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이것을 간파하고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개인의 사익 추구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어떻게 공익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잘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 개인의 자율과 창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첫째로 아직 우리나라에서 충분히 그것이 발휘되지 못하는 영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최근 들어 개인과 시장의 자율성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에너지가 활용되지 못하는 대표적인 예는 안타깝게도 '공익의 대변자'로 일컬어지는 정부가 관여하는 영역이다. 정부는 헌법적·정치적 결단의 소산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해 규율된다. 자연히 의사결정과 업무집행은 적법절차에 의한 통제를 받아야 하고 높은 수준의 투명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통제가 부족할 때 어떤 비극이 빚어지는지 우리는 숱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필자는 오늘날 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관성적인 집착으로 변질돼 정부의 효율성을 갉아먹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조선시대 권력의 전횡을 견제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찰했던 3사(三司)를 무색하게 하는 3중, 4중의 감사 제도는 일선 공무원들을 옥죄어 복지부동과 무사안일을 당연하고 합리적인 선택지(選擇肢)로 만든 지 오래다. 

이제 우리는 정부에 투명성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은 원래 없어서가 아니라 세금도둑이 많아서다'는 섣부른 추측이나 공무원의 '재량권 행사의 일탈·남용'의 우려를 넘어서 '재량권의 불행사'로 인한 시간 낭비와 비효율의 비용을 직시해야 한다. 정부에서 일하는 수십만 명의 고급 인력들이 가진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자율과 창의를 위한 인센티브(유인책) 설계를 고민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또한 '개인과 시장의 자율성이 과연 공공 이익에 부합 하는가'라는 의심도 재고돼야 한다. 물론 시장이 효율적이려면 충분한 경쟁이나 정보가 확보되고 외부효과가 없는 등의 특정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러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경우 시장 효율성의 회복을 위해 정부의 개입이 요구되며 그 수단으로 독점 규제 등을 위한 공정거래법 등이 활용되는 것도 불가피하다.

4차산업혁명은 필연적으로 정보화의 심화를 수반한다. 정보는 사용하더라도 가치가 줄지 않는 비경합성(非競合性)으로 인해 과소 생산되기 쉽다. 또한 추가 생산을 위한 비용은 거의 들지 않고 플랫폼 형태로 사업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독점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4차산업혁명 시대에 불완전경쟁의 위험이 커지는 시장을 보완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이 이전보다 더 커질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합리적인 범위를 넘어서 개인의 욕구와 시장의 기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고 정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흐름이 개인들이 지닌 에너지를 꺾어 기회주의자나 지대추구자(地代追求者)를 만들고 정부의 비효율을 민간에까지 전이시키는 결과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 

정부는 시장실패가 검증된 분야에만 개입·보완하는 수준으로 자기 역할을 재설정하고 직접적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또한 위험을 무릅쓴 도전 끝에 거둔 성취는 존중해줘야 한다. 효율성에 입각한 시장경제제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과실의 총량을 최대한으로 키우되 분배에서는 효율성뿐만 아니라 공정성(公正性)의 기준도 감안해 사회적 조화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구한말(舊韓末) 조선의 지도자들이 좀 더 일찍 신분제를 타파하고 개인들이 에너지를 발산해 사람과 역할과 자원을 자유롭게 조직하도록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웃나라 일본처럼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근대 사법제도를 정비하며 철도망을 갖추는 등 공공재를 공급하는 일에 집중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4차산업혁명으로 세계가 또 한 차례 크게 요동치는 이 시점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먼 훗날의 후손들이 지금의 <미스터 션샤인>과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의 조상인 우리의 행동에 대해 아쉬워할만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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