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또 다른 길- 물길과 철길<10>

바닷길은 도로와 함께 오래전부터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런데 1825년, 새로운 교통수단이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다름 아닌 철도였다. 동물이나 사람이 직접 물자를 운반하던 시대에 철도의 개발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혁명가는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었다. 스티븐슨은 잉글랜드 북동부의 탄광촌인 와이럼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탄광 증기기관의 화부였다. 생활이 워낙 어려웠던 탓에 스티븐슨은 어린 시절부터 날품팔이를 해야 했다.

14세부터 아버지의 조수가 된 그는 하루 12시간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리느라 교육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읽고 쓰는 능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기관차 모형을 만드는 일이었다. 기관차를 만들려면 기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18세부터는 일을 하면서 야학에 나가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이것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더 빠르게, 더 안전하게, 더 저렴하게’ 사람과 화물을 운반할 수 있는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기로 한 스티븐슨은 기관차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1814년 7월25일, 킬링워스에 있는 마차궤도에서 첫선을 보인 기관차는 실린더의 힘이 바퀴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최초의 실용적 기관차는 궤도를 따라 30톤을 실은 8량의 무개차를 말보다 더 빨리 끌고 갈 수 있었다

시속 28Km를 자랑하는 이 기관차가 개통하던 날, 객차에 탄 초대객은 450명이었는데 종점에서 내린 사람은 600명 이상이었다. 늘어난 승객은 도중에서 마음대로 올라탄 사람들이었다. 사람들뿐 아니라 언론의 반응도 대단했다.

‘철로 만든말들(iron horses)' 이 등장했다는 재미난 보도도 있었다. 그후1825년, 스티븐슨은 스톡톤과 다링톤을 오가는 철도를 개설했다. 이것은 철도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같은 철도는 토지, 노동, 자본과 결합해서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나아가서는 지역의 평준화를 촉진했다.

다시 말하면 ’국토의 균형발전‘에 기여했다는 의미다. 또한 철도는 여러 교통수단 가운데서도 대량수송이 가능하고 에너지가 절약되며, 공해가 적어 환경친화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

영국에 이어 미국도 1830년 볼티모어와 일리코트에 철도를 부설함으로써 철도의 시대를 열었다. 이어 프랑스는 1832년, 아일랜드는 1834년, 벨기에는 1835년, 캐나다는1836년, 이탈리아는 1837년, 멕시코는 1850년에 각각 개통했다.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철도가 개통된 건 1853년 인도에서였다. 일본은 그후 1872년에 철도시대를 열었다. 인도는 ‘아시아 최초’ 라는 영광스런 수식어를 달았지만 지금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레일 폭이 제각각이어서다. 원래 철도는 궤도의 폭이 1,435m 이상인 광궤와 그 이하인 협궤가 있는데, 나라마다 통일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인도의 레일 폭은 1,676m짜리 광궤와 1m짜리 표준궤, 그리고 0,76m짜리 협궤로 복잡하게 나뉘어 있다.

게다가 하나의 레일이 중도에 몇 번씩이나 궤간이 바뀌기 때문에 그때마다 승객은 열차를 갈아타고 화물을 바꿔 실어야 한다. 이런 문제는 불편함을 넘어 인도의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마이너스 요인이 되어 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당시, 영국의 자본가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한 나머지 무계획적으로 철도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철도 개통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철도가 개통된 후 70여 년 이 지나서, 또 일본보다 27년 후에야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런데 철도보다 한 발 앞서 선보인 교통수단이 있었다. 바로 전차였다. 1898년 전차부설권을 차지한 이들은 두 미국인이었다. 당초 계획은 청량리 밖 홍릉까지 놓기로 했지만 공사비가 너무 많이 들어 1차로 동대문 안까지만 놓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렇게 적지 않은 돈을 들여가면서 전차의 부설작업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도시를 근대화하기에 알맞은 사업인 데다, 고종이 명성황후가 안장된 홍릉까지 빨리 갈 수 있어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적지 않은 이유로 작용했다. 고종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홍릉으로 행차할 때마다 10만 원이라는 큰돈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미국인 콜부란이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전차부설을 건의했던 것이다.

고종은 홍릉 갈 때의 경비를 절약할 수 있고, 평소엔 일반 백성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또한 전차는 정부가 추진하는 근대화 사업을 가장 상징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1898년 9월5일, 교통의 대혁명을 일으킬 서울시 전차부설공사 시공식이 동대문 안에서 거행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9년 5월4일, 전차가 처음으로 동대문과 흥화문(지금의 서대문 옛서울고등학교 자리)구간을 시험운행했다. 인천과 노량진 간에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4개월 전의 일이었다.

당시 9대의 전차 중 8개는 유리창도 없이 지붕만 얹고 벤치형 나무의자가 놓인 개방형이었다. 단지 고종이 타는 어용 한 대에만 가운데 유리창이 있는 VIP용 객실을 마련했다. 전기로 가는 기차, 전차시대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에도 근대적 대중교통의 시대가 열렸다. 당시 서울의 교통수단이 인력거와 자전거 정도였으니, 가히 혁명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엇다. 시민들의 탑승은 20일부터 시작됐는데, 차비는 엽전5전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전차는 일정한 정거장이 없었다.

탈 사람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다가 손을 번쩍 들어 전차를 세우고 승차하면 됐다. 전차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전차 개통 당시 날씨가 가물어 농사짓기가 힘들자 공중에 매달린 전차의 전깃줄이 번갯불에 튀어 하늘을 메마르게 하고, 땅에 까린 전차 철로가 땅속의 물기를 전부 빨아들여 가뭄이 들었다는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그런데 호사다마 였을까. 운행6일 만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난다.

탑골공원 앞에서 한 어린이가 달리던 전차에 치어 생명을 잃은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개화문물에 은근한 반감을 품고 있던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전차가 불타고 마침내 8월9일까지 운행이 전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전차가 개통되면 홍릉까지 행차할 때,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전차를 타겠다고 했던 고종은 막상 전차가 개통되자, 이 전차 타는 것을 심히 꺼려했다고 한다. 전차가 마치 상여처럼 생겼다는 게 그 이유였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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