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또 다른 길- 물길과 철길<12>

경인선 다음은 경부선이었다. 경부선은 경인선보다 6년 늦은 1905년1월에 개통됐다. 그런데 일본이 경부선 철도를 개설하려고 구상한건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다. 일본 국내에서 한국 침략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일본은 조선의 철도건설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일본군참모부는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장차 도래할 한국 침략기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 지형과 교통, 경제, 백성들의 동향 등 밀정을 파견해 조선을 극비리에 조사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 조정에서는 일본이 나서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철도를 부설하자는 주장들이 나왔다.

일본군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군대와 군수품 등을 선박으로 운반하는 것은 해상권 관계상 곤란한 문제였기에 반드시 일본의 손으로 경부간 철도를 놓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결국 소로쿠는 1892년 일본 외무성를 통해 부산 주재 총영사 무로다 요시부미에게 경부철도 노선 예정지를 답사하라고 명령했다. 측량과 함께 용지 매수방법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일본이 우리나라와 철도부설권에 관한 그 어떤 약속이나 조약도 체결하기 전이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자유롭게 측량사업을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더욱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알고 있는 백성들이 일본의 측량을 묵인할 리 없었다.

고민 끝에 무로다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 사냥를 가장하여 측량를 하는 것이었다. 무로다는 철도 기사를 대동하고 외무관리인 민병묵을 찾아갔다. 그리고 아름다운 나라 조선의 새들을 사냥하고 싶노라고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조선의 새를 외국에도 알리겠다는 감언이설까지 섞어서 말이다. 민병묵은 흔쾌하게 허락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새를 잡는다고 총을 쏘면 구경하기 좋아하는 시골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었다.

무로다는 다시 민병묵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총을 쏘려면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어 위험할 뿐 아니라 놀라서 넘어지면 부상까지 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냥할 때는 멀리 금줄을 치고 붉은 기를 꽂아놓을테니, 그 안으로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조치를 해주십시오.” 순진한 조선의 관료에게 한 이 부탁은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곧바로 금줄과 깃발을 꽂으면서 ‘사냥’ 이 아닌 ‘측량’ 이 시작됐다. 부산부터 대구까지 불과5일 만에 측량을 마쳤다니 속전속결이었던 셈이다. 그후 일본은 조선 조정에 서울과 주요 항구를 잇는 철도부설권을 요구했다.

조선은 일단 이런 일본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1894년 8월, ‘잠정합동조관’ 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핵심내용은 한국 정부가 일본에게 경부·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잠정적으로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오랫 동안 노려왔던 경부철도의부설권을 전격적으로 손에 넣게 됐다.

‘잠정합동조관’ 의 철도에 관한 주요 내용을 보면 “경인· 경부철도를 일본의 자본으로 건설하고 한국 정부가 모든 건설비를 상환할 때까지 일본이 운수 영업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장악하되, 전 선로의 개통 후 50년을 경과하지 않으면 대조선국 정부는 건설계 비용의 상환을 하지 못한다” 고 규정돼 있다. 일본이 경부와 경인철도를 최소 50년 동안은 지배하려고 획책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은 경부철도의 부설을 위해 대규모 답사만도 다섯 차례나 실시했다. 사냥한다고 속여 측량을 한 1차 답사에 이어2차 답사는 청일전쟁 중인 1894년 11월, 일본군부가 실시했다. 2차 답사의 특징은 노선의 중간 지점에서 추풍령을 횡단하여 영동을 경유하려 한 것이었다. 신속하게 병참 수송을 할 수 있도록 서울과 부산 사이의 최단거리를 택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엿보인다.

또한 1899년3월,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주도로 실시된 3차 답사에서 선정한 40여 개의 정거장 예정지 중에는 조선시대부터 유통과 경제의 중심이었던 시장이 무려 30개나 포함되었다. 그 밖에 철도 정거장의 영향권에 들어오는 시장까지 합치면 경부철도와 직접 연결되는 시장의 수는 50여개가 넘었다. 여기서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지역을 장악하려는 일본 자본가들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런 과정를 거쳐 선정된 경부선의 노선을 보면 경기· 충청· 경상도는 물론 호남과 영서의 울산까지도 흡수할 수 있게 돼있다. 이것은 한국 남부의 사회적, 경제적 공간이 경부축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걸 의미했다.

이후에 부설되는 호남선은 경부선의 지선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 경제적 불균형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됐던 것이다. 경부선의 첫 개통식은 1901년 8월20일, 영등포에서 있었다.

경부선 철도의 전 구간이 완전히 개통된 건 1904년 12월27일이었고, 1905년 1월1일을 기해 영업을 시작했다. 이 해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해이기도 했다.

그후에 일본은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을 부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두가 한반도를 거쳐 중국까지 침략하려 했던 일본의 야욕이 낳은 산물이었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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