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대 명예교수·시인

전화벨이 울려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여론조사라는 말이 들렸다. 평소 하던 대로 바로 끊으려다가 행여나 하고 기다려보았더니 역시 종전대로 20대는 2번, 30대는 3번, 40대는 4번, 50대는 5번, 60대 이상은 6번 소리가 들렸다. 6번을 눌렀더니 저쪽에서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순간, 닭 쫓던 개 지붕 바라보는 격으로 허탈했다.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수년 전부터 이래왔다. 그래서 여론조사에는 아예 등지고 살아왔다. 여론조사 전화가 울리면 다음 말이 나오기 전에 끊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그 쪽에는 아예 무관심하다고 할까 체념한 채 살아왔다. 여론조사가 국민으로 하여금 무관심하게 하고, 체념하게 하며 편 가르기를 조장해온 것이다.

■ 60대 이상 조사대상서 외면 다반사

도대체 여론조사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하는 걸까? 60대, 70대, 80대, 90대는 왜 여론조사에서 제외되는 것일까? 개인의 영달보다는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3D업종도 마다하지 않고 탄광의 광부로, 독일의 간호원으로, 열사의 건설현장에서 땀과 눈물, 심지어는 피까지 흘려가면서 더러는 죽기도하고, 더러는 불구자가 돼 돌아온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를 이렇게 사람취급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일을 해도 더 많이 했고, 세금을 내도 더 많이 냈으며, 경험을 해도 더 많은 경험을 한 세대를 이렇게까지 천대하며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인문주의가 말살됐는가.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과 가치가 존중되지 못하고, 조화와 균형을 외면한 채 흑과 백으로 편을 가르는 사고방식으로 굳어져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됐는가.

변화와 경제성을 중시하는 속도전에서 갈 곳을 잃은 구세대의 가난한 노인들에게 선심 쓰듯 세금을 축내면서 생색을 내는 게 정상이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배제된 노인들이 한 때는 우리 사회의 중심 존재였다.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의 적극적 참여자였다.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삶보다는 가정과 국가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봉사한 세대였다.

■ 노인 소외, 다양한 형태로 사회 확산

그러나 지금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 여론조사에서조차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외면당하고 있다. 인간을 경제적 수단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문주의적 사고방식과 실용주의의 참뜻을 되새겨야할 것이다.

탑골공원이나 동묘 부근을 서성거리는 노인들을 경제적 부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존재들이다. 이 나라의 아버지요 할아버지들을 여론조사에서조차 제외시키다니, 이건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누가 어떤 자격으로 누구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무시(無視)라는 글은 없을 무(無)자에 볼 시(視)를 한 자다. 보이는 게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여론조사를 하는 젊은이들 눈에는 60대 이상의 노인이 보이지 않는가. 60대, 70대, 80대, 90대 노인은 복지혜택이나 주어서 표나 관리하는 표퓰리즘 이외에는 쓸모없는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는가.

여론조사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일제 때의 한 에피소드다. 집에 조강지처를 둔 동경 유학생이 신여성을 달고 귀국했다. 집 근처에 이르자 그의 아버지께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논밭에 거름을 져내고 있었다. 함께 귀국하던 그 신여성이 저 분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우리 집 머슴"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농사 잘 지어보려고 논밭 팔고 빚까지 내어가면서 동경 유학까지 시켜놓았더니 제 아비를 머슴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이 나라를 있게 한, 60대, 70대, 80대, 90대 노인들을 힘없고 남루하다고 해서 여론조사에서조차 제외시킨 놈과 제 아비를 머슴이라고 둘러대는 놈은 뭐가 다른가. 입 안에서는 '망나니자식' 소리가 나오려고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부모 세대가 자식놈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여론조사 방법을 시정하지 않고 이대로 간다면 지금 여론조사 하는 젊은이들도 머지않은 장래에 여론조사에서 제외될 게 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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