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하림

▲ 최하림 시인.
달이 빈 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었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죄 많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얼굴이 겨울바람처럼
우우우우 대숲으로 빠져나가는
정경이 보입니다.
모든 진상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출처 : '최하림 시 전집', 문학과지성사(2010)

▲달빛이 얼마나 밝으면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추"고 '그것들'의 '가는 실밥'까지 "역력히 보이"도록 할까. 과장이 심하다고 할 수 있지만, '달'이라고 하는 사물을 끌어와 우리 존재의 '진상'을 드러내려는 상상력이 치열하다. 거기에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을 끌어들이고, "고백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얼굴"을 펼쳐 보이면서 점층적으로 시야의 확장과 의미의 심화를 꾀하고 있다. '달'이라는 진리의 밝은 빛으로 조명해 보았을 때 스스로 '죄' 없다고 당당하게 버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너무도 명백한" '진상(眞相)'에 시인 자신은 "눈을 감을 수도 없다."는 고백이다. 달 부처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 정안(淨眼)이 열렸다고 할까. 불교의 육조 혜능은 사람의 마음을 가르켜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꼬리도 없고 이름도 문자도 붙일 수 없으며, 위로는 하늘을 받쳐주고 아래로는 땅을 버텨주면서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어둡기는 칠흑보다 어두운데, 항상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 존재하지만 움직이고 쓰면서 거두어 가질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다."고 했다. 마음의 달을 밝혀 조심 또 조심, 죄를 덜 지으며 살아가야 할 일이다.

■최하림(崔夏林, 본명: 최호남(崔虎男))

△1939년 전남 신안군 출생, 2010년 영면.
△목포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국문과 중퇴.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회색 수기' 입선, 1962년 동인지 '산문시대' 발간,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빈약한 올페의 초상' 당선으로 등단.
△지식산업사와 열음사 주간, 서울예전 출강, 한국일보 기자, 전남일보 논설위원 역임.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부문 최우수상, 이산문학상 수상.

△시집 :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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