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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칼럼] 민족문화수호의 영원한 스승 '간송'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 일간투데이
  • 승인 2019.03.12 16:34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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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삼일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간송 전형필 전시회(동대문디자인 플라자)를 다녀왔다. 간송이란 산골짝의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를 뜻한다. 간송은 나이 스물네 살 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당시 조선 거부 40인 안에 들었다고 하니, 하늘이 내린 재산이었다. 간송은 휘문고등학교와 와세다 법대를 졸업했다. 부친의 강권으로 변호사의 길을 걸으면서 동포를 위한 변호를 염두에 뒀는데,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의 삶을 선택했다.

먼저 간송은 민족의 얼을 ‘모았다’. 그림, 글씨, 책, 도자기 등은 한 나라의 정신적 기둥이자 자존심이다. 간송은 혼신의 힘을 다해 민족의 얼을 모으고 또 모았다. 민족의 얼과 혼이 서려있는 작품들은 한두 푼으로 구입할 수 없는 것들이고, 또 돈이 있어도 안목과 열정이 없으면 구입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분명한 역사의식과 과감한 결단력이 있어야하고, 오랜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한다.

■ 전재산을 ‘문화재 보호’에 바친 간송

또 간송은 민족의 얼을 ‘지키고’, ‘되찾아왔다’.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돈에 눈이 어두워 귀중한 문화재를 일본에 팔아넘겼다. 간송은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들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겼고,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를 다시 이 땅으로 오게 했다. 간송의 되찾는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현해탄을 건너 신윤복의 작품을 사가지고 왔는데(기와집 30채 가격), 당시 구입한 ‘혜원전신첩’은 국보로 지정됐다. 또 일본에 있는 고려청자 20점을 기와집 400채 값으로 구입했다. 그 때 구입한 고려청자 ‘원숭이 연적’, ‘오리형 연적’, ‘기린 모양 향로’는 모두 국보로 지정됐다. 이를 구입하기 위해 간송은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내놨다고 한다. 1만 마지기면 5천석 논인데, 천석이면 부자요, 만석이면 큰 부자인데,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아니었다. 귀중품을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비행기를 전세까지 냈다. 돈을 안전하게 가져가면서, 청자도 화물칸이 아니라 기내 석으로 싣고 오기 위함이었다.

간송은 최초의 개인 박물관(보화각)을 ‘세웠다’. 28세 때 미술관 터를 구입했고, 5년 후 완공했다. 보화각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라는 집’으로, 민족문화의 보물창고이자 현재 간송미술관 건물이다. 박물관을 세운 이유는 수장품은 힘들 때 매각할 수 있고, 자손에 의해 흩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유산 중 12점이 국보로, 10점이 보물로 지정됐다. 나머지 수집품들도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간송은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신이다.

간송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1942년)·보관한 것이다. 해례는 한글의 원리를 설명하는 한글의 해설서로, 500년 만에 발견된 보물 중 보물이다. 일본 학자들이 우리 문자를 폄하하면서, 고대글자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거나, 심지어 화장실 창살모양이 그 기원이라고 하는 등, 한글을 짓밟았다. 일본이 한글말살에 혈안이 돼 있고, 조선어학회 학자들까지 잡아들인 상황에서, 해례본의 구입과 보관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세종실록에는 해례본을 만들었다고 돼 있는데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애를 태운 책이다. 해례본은 한글의 말문을 연 열쇠이기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광화문 세종대왕의 좌상을 보면, 대왕의 왼손에 책 한 권이 들려있는 데, 바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해례본 구입으로 1만원(기와집 10채 가격)을 지불했는데, 간송의 배포와 인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그의 배포와 인품에 절로 감탄

6·25 전쟁 당시에도 낮에는 품고 다녔고 밤에는 베개로 베면서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해방이후 간송은 예전처럼 문화재를 수집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 누가 모아도 조선 것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서정리에 매진하던 중, 6·25 전쟁이 터졌다. 수장품을 놓고 갈 수 없어 빈집에 혼자 몸을 숨겼다. 피가 마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서슬이 시퍼런 일제 치하에서 서화나 골동에 미친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표적을 피했고, 놀림과 비웃음도 참으면서 전 재산을 바쳐 어렵게 모은 수장품인데, 동족에게 수난을 당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보화각 보물이 평양박물관으로 갈 뻔했는데, 기적적으로 지켜졌다. 1·4 후퇴 때에는 중요 수장품을 기차에 싣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수 만권의 책과 도자기까지 가져갈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부산에 보화각의 수장품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1950년 농지개혁을 통해 토지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이 전쟁 중 화폐가치가 떨어져 모두 휴지조작이 됐다. 간송은 논도 소득도 잃었고, 조금 남은 땅을 팔아서 생활하는 형편이 됐다. 보성학교에 재정사고가 발생하자, 그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쪼들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도자기 한 점만 팔아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남은 재산으로 해결했다. 간송은 1962년 1월 5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간송의 삶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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