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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칼럼] 불멸의 역사적 유산, 임시정부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 일간투데이
  • 승인 2019.04.10 15:16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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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오늘,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태어났다. 3·1 운동 직후 3월 3일 발간된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에 가(假)정부를 조직하고 가(假)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라는 것이 실린 것을 보면, 임정은 3·1 운동과 동시에 기획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국내외적으로 8개가 넘는 임정이 난립됐는데, 이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긴밀한 연락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임정은 1919년 3월 21일 설립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민국의회'였고, 상하이 임정은 두 번째로, 한성정부는 3번째였다. 1919년 9월 11일 3개의 대표적 임정이 하나로 통합됐다. 임정을 상하이에 둔 것은 프랑스가 정치적 망명자들의 활동을 보장했고, 상하이가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통합된 상하이 임정은 3·1 운동을 직접 계승한 정부로서, 해방될 때까지 27년간 대한민국의 대표성을 지닌 정부로 독립을 위해 외길을 걸어왔다.

임정이 남긴 불멸의 유산을 살펴보면 첫째, 단절된 우리민족의 정권을 잇게 해줬다. 임정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일제에 의해 9년여 단절된 '국가성'을 회복·유지시켜줬고, 임정은 한민족 전체의 통일성과 대표성을 지닌 정통정부로서, 독립과 건국을 위해 노력했다. 임정은 3·1 운동의 직접적 계승자이기에 '정통성'을 지녔고, 다양한 정치노선의 독립운동세력이 참가했기에 '통일성'을 지녔으며, 임정에 대한 국민의 위임은 뚜렷하진 않지만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음으로 승인했기에 '대표성'을 지녔다고 하겠다.

둘째, 대한민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임정의 독립운동은 상징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임정은 중요한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했고, 광복군을 편성해 독자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더 나아가 죽음을 각오한 애국청년을 엄선해 단원(한인애국단)으로 가입시키고 특공작전까지 감행했다.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거사가 그것이다. 죽음도 불사한 특공작전을 통해 우리의 강력한 독립의지와 전투적 실천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최장 존속' 임정, 독립운동 세계 유일

셋째, 국제적으로도 적극적 외교활동을 벌였다. 1943년 11월의 미영중은 카이로 선언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했는데, 이는 임정이 중국수뇌(장개석)를 설득해 얻어낸 빛나는 외교적 성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연합국 열강 수뇌들이 독립을 희망하는 수백 개 약소민족들 중 독립을 약속하고 선언한 것은 한국뿐이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한국을 신탁통치하에 두려고 했다. 특히 영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허용하는 것이 일본과의 강화협정체결에 용이하다고 봤고, 한국의 독립보장은 인도의 독립운동을 고무할 것으로 봤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반대했다.

넷째, 인류역사에서 한민족의 존재를 분명히 각인시켰다. 임정은 세계약소민족 독립운동사에서 길이 남을 만한 정부였다. 프랑스가 영국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한 일은 있었으나 극히 짧은 기간(5년)에 불과했다. 또 어떤 약소민족도 제1차 대전 직후부터 제2차 대전 종결 때까지 임시정부를 구성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민족이 없었는데, 한민족이 유일하다.

다섯째, 임정은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다. 임정을 법적 대표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진 않지만,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고 정신적 대표기관이었다. 임정이 국외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에게 한없는 애국,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시켜줬다. 어떤 독립운동단체도 이만큼 철저하게 광복의 날까지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27년 최장기간 존속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한 유일한 정부였다.

■日 패망예견…첫 구체적 건국 준비

여섯째, 임정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반포해 광복 후 서울에서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준비했다. 일본패망을 예견하고 처음으로 건국을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임정의 임시헌장에서 건국강령에 이르기까지 이념적 배경이 된 것은 소앙 조용은 선생의 3균(均)주의이다.

선생은 우리에게 조소앙으로 더 알려져 있다. 선생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꿈꿨다. 신민주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점을 극복·보완한 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인데, 정치는 민주주의를, 경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교육은 국비의무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는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를 종합 체계화한 것으로, 매우 이상적 정치사상이었다.

또한 선생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개인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화를 통해 민족은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함으로써 약소민족이 피압박의 지위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국가의 균등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무너뜨림으로써 모든 국가가 서로 평등한 지위를 도모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놀라운 통찰력이다.

상해 임정은 수많은 굴곡과 수난이 있었고 심지어 내분도 있었지만,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중심적 위치를 잃지 않았으며 민족사와 독립운동사에 불멸의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임정이 이룬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00주년을 맞는 오늘에서 돌아봐도 그렇고 더 먼 미래에서 돌아보아도 그 불멸의 업적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억되고 간직될 것이다. 임정 수립일 4월 11일은 이런 큰 뜻을 지닌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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