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문현미

▲ 문현미 시인
불현 듯,
눈발 흩날리는 서늘한 그날에

겨울 길목을 건너온 청빛 바람이
빠른 십육분음표를 찍고 있다

첫사랑 풋풋한 속살에
환한 통증이 느린 음조로 번지고

순님이 핏방울 움찔거리며 뜨겁게
바투바투 조바심을 내는데

목젖 타오르는 어느 눈 먼 순간에
모두었던 속울음 마지막 고백처럼 쏟아낸다

먼저 사랑하고
목숨의 결대로 끝까지 사랑하라!고

가장 빛날 때 툭- 내려놓는
쓸쓸하게 찬란한

붉은 소멸이여

■출처 : '바람의 뼈로 현을 켜다', 시월(2018)

▲"먼저 사랑하고 / 목숨의 결대로 끝까지 사랑하라!" '동백'의 생태에 빗댄 사랑의 메시지가 치열하다. 모든 꽃들이 지고 아직 봄꽃들이 피어나기 전, 황량한 '눈발' 속에서 빨갛게 피어나 봄의 시작을 알리는 동백의 꽃말은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동백은 가난하고 추운 시절을 함께 보내는 친구라 하여 '세한지우(歲寒之友)'라 불리기도 한다. 어려울 때 함께 해주는 사랑과 우정이야말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동백꽃의 원이름이 산다화(山茶花)인 까닭은 차의 재료가 되기 때문일 수 있지만, '다(茶)'자가 '소녀에 대한 미칭(美稱)'이기도 한 걸 보면 동백꽃은 '산 아가씨'를 뜻하는 말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그렇고,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 소설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춘희'의 원제목도 '동백꽃 아가씨(La Dame aux camélias)'다. 동백은 순열하지만 비극적인 사랑의 원형상징인 셈이다.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그러한 비극적 사랑의 주제를 내비치고 있다. 그리하여 내용에서 초경 무렵의 소녀 '순님이'의 '첫사랑'은 '마지막 고백'이 되고, "가장 빛날 때 툭- 내려놓는" '붉은 소멸'이 된다. 그러나 모든 비극의 비밀은 그것이 남기는 높은 이상의 향취에 있다. 우리는 "쓸쓸하게 찬란한" 동백의 그 비극적 운명을 통해 어떤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를 감지한다.

■문현미
△1957년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독일 아헨대에서 문학박사(한독비교문학) 학위 취득.
△1998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독일 본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백석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백석문화대학 부총장 역임.
△제9회 박인환문학상, 2011년 한국크리스천문학상, 제7회 난설헌시문학상 수상.

△시집 : '기다림은 얼굴이 없다' '칼 또는 꽃' '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 '아버지의 만물상 트럭' '그날이 멀지 않다' '깊고 푸른 섬' '수직으로 내리는 비는 둥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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