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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칼럼] 도전을 품게 한 스승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 일간투데이
  • 승인 2019.05.22 11:18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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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려서부터 스승을 만나게 된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직접 스승을 만나거나, 또는 책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스승을 접하게 된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제자의 운명이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가치관을 완성해나간다. 제자들은 일반적으로 스승이 가르치는 길을 따르고 있지만, 스승이 가지 말라고 한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스승은 기다리라 했는데 도전하기도 하고, 계승하라고 했는데 창조로 나서기도 한다. 사제 간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파괴 속에서, 스승이 지키고 만들려고 했던 나라와 제자가 꿈꿨던 나라가 달라,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고려를 지킨 이색과 조선을 창건한 정도전이 그랬다.

통상 스승은 지식과 신념을 가르치지만, 훌륭한 스승은 이에 더해 의구심과 도전을 품게 한다. 제자는 처음에는 스승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지만 때론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제자는 스승에게 등을 돌리거나 파괴함으로써, 스승의 가르침을 더욱 충실히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칼 융(분석심리학)이 그랬다. 만일 모든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기만 했다면 세상은 이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스승과 제자간의 끊임없는 갈등의 산물이다. 스승으로 대표되는 '舊 사상'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 진정한 가르침 실현은 '舊사상' 타파

살면서 가장 듣기 민망한 노래가 있었는데, '스승의 은혜'다. 20여 년 전 법대학생들이 마련한 스승의 날 행사에서의 쑥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학생들이 합창으로 불러주는 노래가사에,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진다"고 할 때, 민망했다. "태산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과 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에서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갚을 길은 오직하나 살아생전에 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겠다"는 대목에 이르니, 부르는 학생들도 민망하겠지만,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 행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스승의 날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스승의 은혜에 등장하는 스승의 무늬조차 없는 필자 자신을 돌아볼 때,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가는 스승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서벽지(島嶼僻地) 학교에서 몇 안 되는 학생들을 혼자서 가르치면서 부모역할도 대신해주는 선생님에게는 하늘같은 선생님이라는 고백이 가능할 것도 같다.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훌륭한 선생님들의 사례를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필자가 훌륭한 선생은 못돼도 필자에게도 훌륭한 선생님들은 계셨다. 당시 서울대는 지도교수가 학위논문심사의 위원장을 겸할 수 없게 돼 있어, 학생들은 위원장의 심기와 눈치도 잘 살펴야 했다. 당시 지도교수님과 논문심사 위원장 권 모 교수님은 세상이 다 알 정도로 사이가 매우 불편하셨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것이 뭔지를 몸소 체험하는 상황이었다.

30년 전 박사학위논문을 심사받을 때 얘기다. 문제는 위원장이신 권 교수님의 글을 반박하는 내용이 학위논문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필자의 반박이 옳다고 믿었지만 만일 그 부분을 지적하시면 어떻게 대처할까, 무척 고민됐다. 당시 하늘같이 여겼던 위원장과의 논쟁은 감히 생각하기 어렵고, 해당부분을 고치면 논문의 전체 흐름이 왜곡되는 상황이라 셋째 날(해당 내용은 다섯 번 심사 중 셋째 날 심사 대상이었음) 심사받으러 집을 떠나는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아내에게 다른 말은 못하고 오늘 심사가 어그러지면 다음 기회에 제출해야 한다는 말만 남기고 기도하면서 심사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권 교수님은 해당 부분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그날 느낀 권 교수님에 대한 존경심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이렇듯 대학사회에도 스승의 은혜가 존재한다. 다만 필자가 그 반열에 오르지 못할 뿐이다.

■ 사제간 끊임없는 갈등이 역사를

지금 우리사회는 사제 간이 너무나 각박하다. 카네이션도 줄 수 없고, 커피 한 잔도 음료수 하나도 안 된다. 스승의 날 카네이션도 학생대표만 줄 수 있다. 카네이션이 감사라기보다는 잘 봐달라는 것이 될 수 있고, 준 사람과 안 준 사람을 차별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나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학생들은 꽃 한 송이조차 법 규정을 따지고 들어야 하는 각박함만 배우지 않을까 염려된다.

지금 우리의 교육현장은 그리 밝은 편이 못된다. 학교는 잠자는 곳이고 공부는 학원에서 한다고 하며, 학생들의 인권만 앞세우다보니 교권은 무시되기 일쑤고, 학부모들의 지나친 관여와 간섭으로 교권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 심지어 거칠게 항의하는 학부모들 앞에 무릎을 꿇은 교사도 있고, 자기 반 학생에게 발로 걷어차이는 일도 있단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우발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이를 이기지 못해 마음의 상처만 간직한 채 교단을 떠나는 적지 않은 교사가 있다고 하니, 스승의 날에 대한 '솔직한 심정'은 우울하다.

역경을 극복한 수많은 사례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례가 있다면 헬렌 켈러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이 어떻게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고, 사회주의운동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헬렌 켈러를 지도한 앤 설리번은 인간치유의 기적을 만든 진정한 스승이었다. 조건이 사람을 패배케 할 수 없다는 설리번의 헌신적인 가르침과 인도가 헬렌의 노력보다 더 클 수는 없겠지만 헬렌 뒤엔 보이지 않는 설리번이 있었다. 제자의 가슴에 희망, 용기, 사랑을 심어주는 모든 설리번 선생님들에게 은혜의 꽃다발을 바친다.

*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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