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시인
아, 두만강 1

-털모자 소년-
박정희


눈 덮인 굴뚝에 연기가 핀다.
털모자 소년이 밥상에 앉는다.
누나와 할배는 말이 없고
감자와 간장 종지만 동그랗게 부딪친다.
동그란 축구공이 부딪친다.

지난여름 물난리에
누나를 구해놓고 아버지가 가고
뒤따라 그림자처럼 어머니가 가고
두만강이 보이는 언덕에 나란히
묻혔다.

사람들은 명태를 잡으면서
그 일을 잊었는가.
장대 끝에 명태를 말리면서
그리 쉽게 잊었는가.

흐릿하게 저물녘
작아지는 무덤이
동그란 축구공으로 굴러와
벽을 향해 벽을 향해 공을 찬다.

■출처 : '문학사계' 45호, 새미(2013)

▲전체주의 사회의 압제 속에서도 개인들은 저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살인적인 가난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몸부림친다. 시인은 '아, 두만강' 연작을 통해 인간성의 이러한 면을 포착하여 비인간적인 사회현실과 대비하면서 그 비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시는 그 가운데 하나로, '털모자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축구공'을 매개로 슬픔과 절망을 극복해보려고 애쓰는 개인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물난리에' 부모를 잃은 뒤 "누나와 할배"와 함께 사는 '소년'에게 '축구공'은 현실의 '벽'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남루한 "밥상에 앉"아서도 '축구공'을 떠올리고, 뭔가 서러울 때면 "공을 찬다". '할배'는 식구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떠난 이들을 기릴 새도 없이 '명태 잡이'에 나서야 했을 것이다. 그런 어른들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소년다운 생각이라든지, '감자' '간장 종지' '무덤'의 둥근 모습에서 '축구공'을 유추해낸 동심이 시인의 눈과 귀를 통해 붙잡히고 걸러져 가슴 뭉클하게 전해져 온다. 6·25 발발 69주년, 지금도 눈물 젖은 두만강 근처 어디에선가 "벽을 향해 벽을 향해 공을 차"는 소년이 있으리라.

■박정희(朴貞姬)
△1936년 함북 길주 출생, 충북 청주에서 성장.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동국대 영문과, 건국대 대학원 석사, 서울여대 대학원 문학박사.
△춘천방송국, 원주방송국, 주월 한국군 방송국, 중앙일보사(여성중앙), 한양여대 교수 역임.
△한송문학상, 한국문학상, 충북문학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시집 : '내실' '문풍지' '술래의 편지' '푸르른 날의 그리운 점 하나' '다시 만날 그날까지' '이별에 관한 사색' '그에게만 들키고 싶다' '꽃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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