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제10조를 다시 읽어 본다.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평등 선언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절대 평등'을 뜻하는 건 아니다. 기회는 고루 부여하되 결과는 승복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을 순 없을 터이다.

사리가 이러함에도 근래 외국어고·자립형사립고 폐지를 두고 우리 사회가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와 진보교육감 등은 자사고·외고때문에 일반고가 황폐화됐다고 진단하면서 폐지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설립 취지에 맞지 않게 입시 교육기관 전락, 고교 서열화 초래, 사교육 유발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논리에서 전북 상산고와 경기 동산고·부산 해운대고 등이 자사고 재지정 평가 기준점수에 미달해 취소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자사고 문제 보완하되 유지 마땅

폐지에 반대하는 쪽은 교육의 획일화 초래와 학생의 적성과 진로에 맞는 학교 선택권 보장, 학업능력의 하향평준화를 우려하며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문제점 보완 후 유지를 주장하며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현재 전국에는 외고 31개교, 자사고 46개교, 국제고 7개교가 있다. 전국 2360개 고등학교의 3%에 해당한다. 우수한 학생들이 외고와 자사고로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자 일반고가 황폐해간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7월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외고·자사고 폐지를 밝힌 후 진보 교육감들이 현실화시키고 있다. 폐지를 주장하는 쪽의 논리도 전혀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문제가 있다고 해서 지금까지 20여 년 가까이 유지돼온 교육정책을 정부가 정밀한 여론 수렴과 해당 학교의 특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단시일 내 뒤집는 것은 행정편의주의라고 하겠다.

더구나 공부 잘하는 학교라서, 취업 잘되는 학교라서 폐지하면 나라를 이끌 인재는 어떻게 기를 텐가. 우리 교육이 평등주의에 매몰돼 왔다면 '선진국 대한민국'은 불가능했다. 최첨단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라고 해도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그래서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수월성·다양성·전문성 교육을 백안시하는 태도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사람이 가치를 창출하고, 좋은 인재가 현실의 난관을 타개하고 미래를 이끌어 간다. 세계적 기업도 뿌리를 지탱하는 힘은 큰 공장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인재인 것이다. 그래서 글로벌 기업들은 인재 육성과 영입에 전사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수학의 정석' 저자 홍성대 이사장은 자신이 세운 자사고인 상산고에 지난 14년간 440억원을 출연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 땐 제발 자사고 신청하라고 하더니 뿌리가 같은 정부에서 정반대 압박을 한다"고 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는 데 백년대계는커녕 이십년 계획도 못 된다면 어떤 사학이 인재를 키우겠다며 돈을 내놓을지 암담할 뿐이다. 홍 이사장은 기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자사고를 죽이면 결국엔 학교의 힘이 아니라 사교육의 힘으로 형성된 '8학군' 등이 다시 활개를 치게 될 것이 자명하다"고 우려했다.

■4차산업혁명 이끌 인재 육성 절실

자사고 등이 존립 위기에 처해 문을 닫으면 자녀를 외국에 보내 교육시킬 수 있는 소수의 상류층에게만 수월성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 자사고 등의 수월성 교육 기능을 학원이 대신하면서 사교육이 더 번창할 수도 있다. 수월성 교육이냐, 평등한 교육이냐는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해법은 명료하다. 정부는 자사고 등의 존립 기반을 마련해 주면서 일반고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더 나은 방안을 궁리해야 한다. 교육 당국은 현재 일반고의 문제점을 심도 있게 분석해 이에 대한 행·재정적 지원 강화를 비롯해 특색 있는 교과중점학교 확대, 진로지도 강화, 단위학교 운영의 자율성 확대, 고교학점제 운영을 위한 인프라 조기 구축 등을 통해 외고와 자사고 못지않은 수준 높은 교육을 유도함으로써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

재강조한다. 평등지상주의엔 퇴보·자멸의 함정이 있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길 당부한다, 우수한 인력을 키워내는 것은 국가 책무다. 평등성에 기반한 수월성을 추구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황폐화를 막는, 튼튼한 백년지대계의 첫걸음이다. /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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