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독립적 여성들 주인공으로 등장...인종 다양성까지 나타나
여성 시각 아닌 소재로만 활용된 점이 한계

▲ 디즈니 인어공주 실사영화 주인공 에리얼 역에 캐스팅된 '할리 베일리'. 사진=할리 베일리 인스타그램

[일간투데이 홍정민 기자] 편견을 깨는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전형적인 남성, 여성에 반기를 들고 고정적이라고 생각해온 성 역할을 바꾸거나 원작을 뛰어넘어 다양한 인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제작되고 있는 것. 대중 취향에 민감한 할리우드가 먼저 변화하기 시작했고 다른 국가들도 서서히 변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 디즈니, 인종을 뛰어넘는 캐스팅...'흑인 인어공주 탄생'


디즈니는 그동안 전통적인 성 역할을 답습하고 항상 비슷한 생김새의 여주인공만 등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1995), '뮬란'(1998), '라푼젤'(2010), '겨울왕국'(2013) 등을 통해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를 제작했다.

최근 국내에서 약 900만명을 동원한 디즈니 실사영화 '알라딘' 흥행도 재스민 공주의 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원작보다 한층 더 강한 인물로 재탄생한 재스민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되고 싶어한다. 노래 '스피치리스'(Speechless)를 통해 "나는 침묵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다짐을 드러낸다.

디즈니·픽사의 '토이 스토리4' 속 보핍 역시 이전 시리즈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3편에서 우디의 다소곳한 장난감이었던 보핍은 4편에서는 치마를 벗어 던지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누군가에게 종속된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디에게 더 자유로운 삶이 있음을 알려준다.

디즈니의 변화는 성별을 넘어 인종으로 이어졌다. 최근 '인어공주' 실사영화의 주인공으로 흑인 배우이자 가수인 핼리 베일리를 캐스팅해 화제가 됐다.

원작 애니메이션 주인공 아리엘은 빨간 머리의 백인으로 그려졌다. 백인 공주 역할에 흑인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신선하다'는 반응도 있지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의식해 원작을 훼손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진화"라며 "흑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전체관람가 영화의 경우 어린이 관객에게 특히 파급력이 크다"며 "지금의 아이들은 디즈니 영화를 통해 인종의 다양성과 여성의 주체성 등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디즈니는 전 세계 관객을 전부 타깃으로 하고 있다"며 "관객층을 넓히기 위한 마케팅의 하나"라고 분석했다.

영화 '롱샷' 스틸 이미지. 사진=TCO(주)더콘텐츠온,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 중년 남성들의 수중발레 도전기, 여선 대선 후보의 러브스토리


오는 24일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 '롱샷'은 첫사랑 베이비시터 샬럿(샬리즈 시어런)을 20년만에 만난 실직 기자 프레드(세스 로건)가 현직 미 국무 장관이자 대선 후보가 된 그녀의 연설문 작가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여성 대통령, 여성 대선 후보는 현실에선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대 잘 나가는 여성의 사랑 이야기라면 달라진다.

현대 남성판 신데렐라 구조지만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그 자체보다는 사랑과 야망, 둘 다를 당당하게 쟁취하는 여성 캐릭터에 더 주목한다. 주연을 맡은 샬리즈 시어런은 "남자 때문에 야망을 던져버리지 않은 모습이 많은 현대 여성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제목 롱샷(Long Shot)은 모험을 건 시도를 의미한다.

오는 18일 개봉하는 프랑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중년판 '워터 보이즈'다. 지난 2002년 나온 일본영화 '워터 보이즈'가 수중발레에 도전한 남고생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벼랑 끝에 몰린 가장들이 수중발레에 도전하며 자신감과 삶의 행복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우울증을 앓는 백수 베르트랑, 파산 직전의 사업가 마퀴스, 캠핑카에서 지내며 로커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시몽, 입만 열면 독설을 내뿜는 로랑 등. 각자 가정과 일, 사회에서 소외된, 혹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여덟 아웃사이더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여성 전유물로 여겨지는 수중발레팀에 합류해 함께 훈련하면서 서로 의지한다. 배가 제법 나오고 몸과 다리에 털이 수부룩한 40∼50대 아저씨들이 수중발레를 하는 모습은 초반에 관객을 긴장하게 만든다. 그러나 오합지졸 루저들이 역경을 딛고 금메달을 목에 걸 때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전해진다. 특히 스파르타식으로 훈련하는 여성 코치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움찔하는 아저씨들의 모습이 폭소를 자아낸다.

오는 10일 개봉하는 '기방도령'은 조선 최초 남자 기생이라는 소재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기방에서 자란 허색(이준호)은 연풍각이 폐업위기에 놓이자 직접 기생이 돼 여인들을 위로한다. 남장하고 기방을 몰래 찾은 여인들은 허색의 춤과 악기 연주를 넋 놓고 바라본다. 종전 사극에서는 볼 수 없던 광경이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들이 성 역할 변화를 시도했지만 코미디 영화 속에서 웃음 소재로 활용한 데 그쳤다는 점이다. 정지욱 평론가는 "영화 속에서 남녀 성 역할 변화는 계속 있었고 관객들의 요구로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졌다"며 "그러나 여성의 시각으로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고 주제가 아니라 소재로만 활용된 점은 한계"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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