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훈 박사(서경대학교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일간투데이] 90년대 첫 번째 석박사 과정을 하면서 외국에 있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이 ‘학교에서 버스 타고 20분이면 청계천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뭐든 사고, 뭐든 만들 수 있었다. 돈만 있으면 잠수함도 만든다는 당시의 하늘을 찌를 듯 한 청계천, 을지로 세운상가의 자긍심 일부를 감당하고 있던 세운기술서적이 있었다.

상가 근처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들려 대화를 나누고 그 분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에 대한 필요성이 모여서 책이 출간되었다.

표지도 투박하고, 사진은 점박이 흑백 인쇄에 삽화도 손으로 그려진. 하지만 쪽마다 기름냄새, 땜납냄새가 우러나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현장과 가까운 출판사, 서점이어서 소중했다.

요즘은 제조, 개발 실무자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자 하는데, 번역이 엉망이라도 참고할 만한 최신 기술서적 하나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1980년대에 자동차 관련 일을 하시던 아버지 서가에 일본의 ‘자동차공학’ 월간지가 몇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중학생인 나에게 모든 페이지가 유광 고급지에 생생한 자동차 사진과 부품 사진이 가득한 자동차공학 책은 엔지니어의 영혼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후에 6년치 모두 기아자동차에 기증하셨는데, 연구원 분들도 띄엄띄엄 가지고 있던 자동차공학 월간지 6년치를 모두 가지게 되어 기뻐하셨다고 들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약속이나 한 듯 89년에 토요타가 렉서스를, 닛산이 인피니티를 북미 시장에 출시하던 때였다. 혼다는 1986년에 아큐라를 미국 시장에 런칭하였다.

세계 자동차 시장 전체를 장악한 일본의 기술력 기반에 기꺼이 엔진을 해체해서 장단점을 공유하고, 수프라, 스카이라인, NSX, RX-7으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디자인들을 감춤 없이 드러내어 일반인, 회사 밖 해당 분야 엔지니어들과 나누는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기술로 일본을 능가하는 과학입국의 첫걸음은 ‘책’이다. 책이 인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명제는 비단 인문서적 뿐만 아니라 기술서적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반도체 공정, 회로설계, 디자인, 소재, 부품, 가공기술, 전산... 아니 좀 더 기초적인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공학 어느 분야도 제대로 번역된 최신 기술 관련 서적이 없다.

비교적 자유롭게 원어로 된 최신 논문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부 대기업/연구소 연구진과 교수들뿐이다.

해외 기술 관련 서적 가운데 교수진에 의해 번역이 되는 대상은 시장원리가 많이 개입된다. 교과서로 사용되어 출간 부수가 보장되고, 번역자 리스트에 오를 경우 명성에 도움이 되는 경우다. 물론 업적 평가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번역은 시장원리에 맡기면 된다.

좀 더 최신 기술과 관련된 서적은 100쪽이 되지 않는 책이 2천불을 쉽게 넘기는 경우도 많고, 저작권료도 높기에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비영리재단이나 공공기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시장에서는 많이 팔리지 않아도 국가의 이익에 수만 배 도움이 되는 서적들의 번역과 정기적 출간이 우리나라의 기술수준이 극일을 넘어 세계적 경쟁력을 갖는 기초가 될 것이다.

그런데 국내 대기업의 경우 소재, 부품, 반도체, IT, 자동차 분야에 걸쳐 예외 없이 아주 효과적으로 실무능력을 키울 수 있는 자체 연수용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

자체 고참 엔지니어들의 실무경험에서 나온 진짜배기 교재들이다. 교과서로 제공되는 자료의 상당부분은 기밀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제는 ‘어떻게 만든 교재인데 이걸 풀어?’ 감추고 있기 보다는 국익이 기업의 이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조금 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출 100억불을 넘기기 시작했다고 기뻐하던 1977년 일본과의 격차와 현재 차이를 살펴볼 때, 극일은 너무나 국수적이기도 하고 미래의 목표가 되기에는 너무 낮은 수준에 있지 않나 싶다.

일할 사람이 줄어가는 초고령 사회의 미래에 우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려면 교육제도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현재 일하고 있는 우리 학교에 와서 한 학기 전산과목 강의를 마치고 학생들에게 공식적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이 있다.

“이전에 가르치던 학교, 같은 과목 수강생 50명 중 상위 5명의 답안과 너희들 20 명 중 상위 3명의 답안 수준에 차이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럽다. 미안하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명문 사립대로 불리는 모교에서 10년 이상 전산강의를 맡았었다. 나름 인기가 높아서 “제 과목 수강신청에 성공하신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시건방진 멘트로 첫 강의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입학점수에 꽤 차이가 나는 두 학교 학생들 중 정말 즐겁게 강의에 빠져 공부를 한 학생들 사이에 수준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지난 40여년 동안 가졌던 나의 편견을 부끄럽게 만드는 학생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있다.

현재 거의 모든 대학의 도서관은 지역 주민에게 개방되어 있다. 신분증만 들고 가면 출입증을 발급받아 열람도 가능하고 책도 빌릴 수 있다.

개인적인 바람은 대학의 개방이 강의실에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의 오픈 코스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려면 특정 강의를 듣기 원하는 사람은 대학교와 교수에게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고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순수기초학문이나 인문학은 비용 문턱을 낮추거나 없애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배우고 싶은 욕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이유’가 되도록 모든 사회 구성원이 마음을 열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특정 학교의 졸업장을 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반도체 공정에 대해 알고 싶다면 어디선가 배울 곳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배우고 싶으면 배울 수 있게 해주어야 우리가 살아남는다.

기업은 기밀이 아닌 수준에서 교육 자료를 공유하고, 대학은 비어가는 학생의 자리를 배우고 싶어 하는 국민으로 채워야 한다. 어차피 적정 연령의 피교육자 수는 줄었다.

앞으로는 국문학을 전공한 챗봇 개발자, 미술을 전공한 반도체 아키텍쳐 설계자, 마케팅을 전공한 수학자를 키워내야 그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근원에서 세계를 주도할 가치가 창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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