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제 강제징병 피해 유족 이윤재씨

▲ 일제 강제징병 피해 유족인 이윤재씨가 아버지의 일본 강제 징병 당시 사진을 내밀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사진=김현수 기자

[일간투데이 유수정, 권희진 기자] “별다른 이유도 없이 아버지의 아래 입술에 구멍을 뚫고 쇠고리를 몇 개씩 달아놓았더군요. 주먹밥 하나로 하루 온종일 고된 노역을 버티셨다는데 정확한 사망 시기나 장소조차 알고 있지 못해 자식으로서 마음이 찢어집니다.”

일제 강제 징병 피해 유족인 이윤재씨는 아버지인 고(故) 이화섭씨를 떠올리면 늘 목부터 메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이씨가 내민 사진 속 고인의 입술에 끼워진 쇠고리는 흡사 소의 코청을 꿰뚫어 끼워놓은 쇠코뚜레 같았다. 사진을 접한 기자 역시 코끝이 찡해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잠시 휴가를 나오셨을 때 들고 나오신 사진입니다. 이후에는 가족들 모두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이씨에 따르면 아버지인 이화섭씨가 강제 징병된 후 사망한 나이는 고작 21세였다. 20살을 갓 넘긴 청년이 강제로 끌려가 고된 노역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가족 때문이라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당시는 전국적으로 한 가정 당 한명씩을 강제 차출해 끌고 가던 시기였습니다. 징병이나 징용을 거부할 경우 가족 전체를 즉살하겠다는 협박이 잇따랐죠. 이에 저희 아버지 역시 남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결혼 6개월여만에 일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태어날 제 얼굴은 보지도 못하신 채 말이죠.”

일본에 의해 강제 동원될 경우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공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남은 가족들은 가족을 대표해 이화섭씨를 보냈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일본이 유가족인 저희에게 밝힌 아버지의 죽음과 실제 현장에서 살아 돌아오신 동료분의 증언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결국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대신해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이씨는 1994년부터 수많은 징병·징용 피해자 및 유족들과 함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소속으로 삼성동 미쓰비시 건물 앞에서 3년여간 시위를 펼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현재는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장인 최봉태 변호사와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 시민모임 대표 등과 함께 ‘일본 측 사과와 배상을 위한 시민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씨는 무려 25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일본 측의 진심어린 사죄와 합당한 보상을 위해 노력해왔지만 아직까지 변화한 것은 하나도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도리어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이 행한 경제보복은 유족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용서할 수 없다며 소리를 높였다.

“아버지를 일찍이 여읜 저는 당시 아버지가 받았던 모진 핍박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함께 활동하던 이들을 통해 알게 된 일본이 행한 가혹한 고문과 협박, 수탈과 착취 등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입니다. 일본은 경제보복을 행할 것이 아니라 대법원이 이 같은 판결을 내린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 일제강점기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강제 노동 중 원자폭탄 피해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한국으로 귀국한 김한수 할아버지(102세)에 따르면 일본은 강제 노역 중인 한국인에게 개에게도 안 줄 법한 음식을 죽지 않을 만큼만 주고 죽으면 내다 버렸다. 죽지 않으면 또 일을 시켰다. 죽을 만큼 고생만 시켜놓고 반성할 줄도 모른다는 게 김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최근 불매운동 등으로 전 국민이 일본의 만행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같아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보상이 아닌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입니다. 일본이 피해자와 유족, 우리 국민 모두에게 용서를 빌 때까지 절대로 이 사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의 대부분이 고령으로 사망했을 정도로 너무 오랜 시간 끌어온 만큼 이제는 국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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