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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속에 꽃 핀 사찰 창건설화] 법의 지팡이가 외호하고 있는 듯한 해인사(海印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09.22 12:50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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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지난 2012년 파키스탄 간다라 불교유적지 순례길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 후 수행 시절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줄도 모른 채 깊은 선정에 들자 주변 나무들이 비 오는 날 우산을 받치듯 햇빛을 가리는 조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간다라 지역은 부처님 열반 500년 이후 처음으로 불상을 포함한 성물(聖物)들이 그리스 희랍의 조형 양식을 통해 조성된 불교 문화의 보고이자 성지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선정 삼매에 든 수행자를 나무들이 외호해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조각상은 ‘수행자에게 이적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와 같은 비슷한 형상을 나타내는 사찰이 바로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海印寺)다. 부처님의 법을 나무에 새겨 국난극복과 국운 융성을 기원했던 팔만대장경을 외호하는 해인사 경내 학사대 전나무가 장경각 입구에 아직도 늠름하게 법을 외호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해인사에 가서 장경각에 들러 예를 표한 뒤 학사대로 나오는 길에 지난 2012년에 파키스탄 간다라 지역에서 봤던 바로 그 조각상이 겹친 적이 있었다.

바로 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는 화엄종에 입각한 화엄십찰의 하나로 세워진 신라 시대 고찰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한국 불교 최초의 총림으로 선원, 율원, 승가대학(강원)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 사찰로,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어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라고 부른다.

해인사는 ‘대방광불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에서 절 유래가 이어져 오고 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로,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래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라는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다.

해인사가 부처님 법을 기리는 법보사찰로 성지화된 계기는 ‘고려대장경’이 봉안된 삼보 사찰이고, 대한불교조계종이 최초로 지정한 해인총림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화엄 도량으로서 해인사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9년에 강화도 선원사에 있었던 ‘고려대장경’을 이전 봉안하면서 법보사찰의 위상을 갖게 됐다.

‘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와 ‘가야산해인사고적창건기’에 따르면 절이 창건된 배경도 예사롭지 않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돼 융성하던 시기인 중국 당나라 양무제 때 지공 화상이 임종에 앞서 '동국답산기'라는 책을 제자들에게 건네주면서 "내가 죽은 얼마 후에 신라에서 명승이 찾아와 법을 구할 터이니 이 책을 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과연 이후 신라에서 순응, 이정 스님이 오자 지공 화상 제자들은 순응, 이정 스님에게 ‘동국답산기’를 전했다.

지공 화상의 제자가 '동국답산기'를 두 스님에게 주면서 은사인 지공 스님이 임종할 때 하던 말을 전했다. 두 스님이 그 말을 듣고 지공 스님의 묘소에 찾아가서 "사람은 고금이 있거니와 법에야 어찌 앞뒤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밤낮으로 이레 동안을 선정에 들어 법을 청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무덤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지공 화상이 나와서 법을 말씀하고 의발과 신발을 전해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별 비보 대가람 해인사를 세우라"하고는 다시 무덤 문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두 스님이 신라로 돌아와 우두산 동북쪽으로 고개를 넘고 다시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사냥꾼들이 알려준 물 고인 데(지금의 바로 대적광전 자리)가서 풀을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광명이 나와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다. 그때 마침 신라 제40대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 병이 나 어떠한 약을 써도 효력이 없자 고승의 구호를 찾고 있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이 지나가다가 하늘에 치솟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고, 이상한 사람이 있는가 여겨 산 아래에 이르러 숲을 헤치면서 들어가다 한창 망설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우가 바위 위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두 스님이 선정에 들어 방광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왕궁으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나 두 스님은 다만 "이 실 한끝은 궁전 앞에 있는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병이 곧 나으리라"라고 하고 수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등창 병난 왕후를 위해 스님이 말한 대로 시행하자 과연 배나무는 말라 죽고 병은 나아 임금이 감격하여 해인사를 창건토록 하는데 이때가 애장왕 3년 802년 10월 16일이고 애장왕이 친히 절에 와서 당시로써는 거액의 전답 2500백결을 시주했다는 것이다.


그 해인사 경내 장경각(藏經閣)에 보존 중인 ‘고려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경(經), 율(律), 론(論) 삼장(三藏)으로 고려 시대 거란과 몽골의 침입에 맞서 부처님의 원력과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고려인의 열망을 담았다. 고려 현종 2년인 1011년에 착수하여 약 240년 동안 완성한 세계 최초, 최고(最古), 최고(最高) 목판본으로 판수가 8만1350장에 8만4000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初彫]대장경은 현종 2년인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회향시켜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됐지만,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골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뒤 무신정권 하의 최우가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6년만인 1251년에 회향한 불사가 지금 해인사에 보관된 ‘고려대장경’이다.

바로 그 대장경을 봉안한 서쪽 언덕에 가야금을 켜면 수많은 학이 날아와 고운 소리를 들었다는 학사대(學士臺) 전나무가 대장경을 외호하고 있다. 해동의 신동으로 알려진 고운 최치원 선생은 은퇴 후 학사대에서 제자들에게 "지금부터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 지팡이를 꽂고 갈 것이니 만약 싹이 터서 잘 자란다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니 학문에 전념하라"라고 말하고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바로 그 지팡이가 천년이 넘도록 장경각을 외호하는 듯한 형상을 한 전나무다.

지난해 6월 유네스코에서 한국의 산사 승원 7개 사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전인 지난 2007년 6월에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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