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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속에 꽃핀 사찰 창건설화] 이타행 화엄도량 범어사(梵魚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09.23 14:17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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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향인 맑고, 청정하고,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하자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화엄경’의 수행을 내걸었던 사찰이 바로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金井山)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4교구 본사(本寺)인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범어사다.

동국여지승람과 범어사 사적기 등에 따르면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는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는 금정산 산마루에는 금빛을 띤 우물이 항상 가득차 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속에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고 있다”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고기와 황금우물 그리고 산 이름을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신라시대 화엄십찰(新羅華嚴十刹)의 하나인 범어사의 창건은 의상 대사가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678년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범어사는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 때로는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중요한 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라 당시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 및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모셨던 2층의 미륵전(彌勒殿)을 중심으로 서쪽에 3칸의 비로전(毘盧殿)을 세우고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거의 모든 전각들이 불탄 뒤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복원을 시도하는 등의 부침 속에서도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범어사로 거듭나고 있다. 경상남도 3대 사찰로 발전하기까지에는 창건주인 의상대사, 신라십성(新羅十聖) 중의 한 사람인 표훈스님, 일생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 낙안(樂安)스님, 구렁이가 된 스승을 제도한 영원(靈源)스님, 근대의 경허(鏡虛)스님, 만해 한용운(韓龍雲)스님, 동산(東山)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세대를 넘는 수행 스님들의 기도 가피의 법향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범어사 스님들은 소개했다.

범어사에는 화엄도량 임을 증명하는 절 전각 배치 구조속에 숨겨진 낙안스님, 낭백수좌(浪伯首座) 혹은 만행수좌(萬行首座)라는 스님의 수행담이 이채롭다.

낙안스님은 범어사로 출가, 특히 보시행을 발원하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해 희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원력을 이룩한 설화가 전해온다.

조선시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받드는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 여파로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과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범어사에 철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만도 36종이었다. 때문에 스님들 자신은 수행과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노릇 하기도 바쁜 나날이었다.

낭백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고 "금생에는 복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리라. 그리고 그 관리의 특권으로 범어사 스님들의 부역을 혁파하리라"라는 뜻을 세웠다고 한다. 그 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복을 짓기 시작해 지금의 기찰 부근인 동래를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의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행인들의 식수를 제공하는 한편 넓은 밭을 개간해 참외, 오이, 수박 등을 심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상 보시했다. 또 틈이 날때마다 짚신을 삼아서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신을 보시하는 등 온갖 선행을 베풀었다.

마지막 늙은 몸뚱이까지도 보시하고자 돌아가실 때에는 범어사 뒷산 밀림 속에서 삼일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히는 밥이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호랑이에게 몸보시에 앞서 본인이 발원했던 세 가지를 증명할 일을 남겼다고 한다. 첫 번째가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에는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 앞 말에서 내리는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으며, 두 번째는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본인이 스스로가 열 것이며, 세 번째는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십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범어사 스님들은 중앙의 순상국(巡相國)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내는 관리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언제나 지방관리가 와도 그러했듯이 주지스님 이하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부복하고 기다렸지만 이 관리는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 말에서 내리렸다. 또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뒤 수 십 년 동안 봉해둔 낭백스님의 방 앞에 와서는 문을 열라하여 봉함을 뜯고 열어보니, 개문자시폐문인(開門者是閉門人, 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문을 닫은 사람이다))이란 스님의 친필유묵이 몇 십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주지스님의 차대접을 받으면서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36종의 부역을 혁파해 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그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어산교’에서 500∼600m 정도를 아래로 내려가면 옛날에 사용하던 길옆에 몇 개의 비석 중에서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祛寺弊永世不忘壇)'이라는 비가 그것이라고 스님들은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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