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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속에 꽃핀 사찰 창건 설화] '패밀리 도통'의 산실 월명암(月明庵)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09.25 13:34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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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도 깨닫기 어려운데 한 가족 네 명이 깨달았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사찰이 있다. 부설(浮雪) 스님이 환속 후 장가를 가서 아들, 딸, 부인과 함께 모두 득도했다는 월명암(月明庵)이 바로 그 곳이다.

부설전(浮雪傳)과 월명암 사적기에 따르면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내변산로 능가산내 월명암(月明庵)은 691년에 부설(浮雪) 거사가 창건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 소속 암자이다.

부설(浮雪) 거사는 재가 불자로서 홀로 도를 깨달은 인도의 유마 거사, 중국의 방 거사와는 달리 가족 네 명과 함께 깨달음을 얻어 세계 불교사에 전설이 됐다. 누구라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으로 정진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의 증표를 남긴 거사 불교의 신화이다.

월명암(月明庵)은 누구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성도담(成道譚)의 최고봉으로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행 정진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설화에 따르면 동료 스님들과 만행 중이던 부설 거사가 소낙비를 피해 잠시 머문 거사 집의 벙어리 처녀(묘화)의 간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환속 후 아들 등운, 딸 월명을 낳고 한 가족 모두 불도를 이루어 세계 불교사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때는 바야흐로 백제 시대 의자왕 10년째인 650년 무렵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고현에 구무원(具無寃)이라는 불교 신자가 늦게 묘화라는 딸을 얻었다. 무남독녀로 금지옥엽처럼 키웠지만, 딸이 성장하면서도 말문이 트이지 않자 구 씨 내외는 하루하루 수심과 시름이 쌓였다. 딸 묘화 나이 20세 되던 어느 봄날 먹장삼을 입고 바랑을 둘러매고 만행을 가고 있던 스님 세 분이 마을을 지나가던 차에 느닷없이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로 스님들은 구 씨 집에 머물게 된다.

그들이 바로 부설(浮雪), 영희(靈熙), 영조(靈照)라는 스님이었다. 해가 저물었으나 비는 개지 않고 계속 내려 부득이 구무원 거사의 집에 신세를 지기로 하고 행장을 풀었다. 그날 밤 구무원 거사의 벙어리 딸인 묘화가 갑자기 말문을 여는 이적이 일어났다. 말문을 연 딸 묘화는 아버지 구무원과 어머니에게 “부설 스님과 소녀는 전생에도 인연이 있었고 이 세상에도 인연이 있으니 인과를 따르는 것이 바로 불법이라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소녀 삼생연분을 이제야 만났으니 죽기를 맹세하고 부설 스님을 남편으로 섬기겠습니다”라며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문을 열었다.

20년 동안 말을 하지 않던 딸 묘화가 만행 중인 스님들이 소나기를 피해 집에 머물자 첫 일성이 부설 스님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 삼세의 인연설로 부모에게 간청하는지라 승낙할 수 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부설 스님이 과연 딸의 청혼을 받아들일 것인지가 또 다른 걱정거리로 남았다.

구 거사는 날이 밝자마자 부설 스님에게 딸 묘화의 간밤의 사연을 간곡히 말씀드렸고 부설 스님도 자작자수(自作自受)와 인(因)이 과(果)가 따르는 법이라 여기며 자기를 만나기 위하여 20년간 묵언 수행을 해온 묘화를 차마 뿌리칠 수 없어서 두 도반(道伴)과 작별을 고했다. 도반인 영희, 영조 두 스님은 오대산(五臺山) 문수도량(文殊道場)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고 부설 스님은 묘화 보살과 혼인을 맺은 후 거사라 자칭하고 묘화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부설 거사는 묘화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등운, 딸 월명을 낳아 성인이 되자 병이 있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서해백강(西海白江)변에 초가를 짓고 지금의 망해사(望海寺)에서 석가모니 세존의 ‘일좌부동경(一座不動經)’ 6년과 달마대사(達摩大師)의 9년 면벽을 본받아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옛날 도반인 영희, 영조 스님이 금강산 만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옛 도반인 부설 스님이 수행 중인 망해사를 찾아와 보니 행색이 초라해 보이자 비아냥대는 말투로 “부설 스님,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였으니 그간 수행 정진한 공부를 점검해보자”라고 했다. 하여 세 스님은 "낙수 병 세 개를 처마에 높이 달고 세 명이 지팡이로 일시에 때리자"라고 하고 때렸는데 두 개는 깨어지면서 물이 쏟아져 버렸지만 부설 거사가 때린 병은 깨어졌어도 물은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청천백일에도 풍운 조화를 부려 때아닌 비와 눈을 내리게 하면서도 일 편의 눈과 한 방울의 빗방울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이적을 보였다. 부설 거사는 이와 같은 이치를 두고 두 스님에게 말하기를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병이 깨어져도 물은 공중에 매달린 것과 같다"라고 법문을 남긴 후 스님들과 헤어졌고,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내변산로 능가산(楞伽山)에 월명암을 지어 가족과 함께 정진 끝에 한 가족이 모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월명암은 부설, 묘화, 등운, 월명의 '패밀리 도통'의 성지를 상징하는 4명의 성인이 수행했다는 '사성선원(四聖禪院)'에는 지금도 스님들의 선 수행이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 시대 선조 때 석가모니 부처님이 환생했다고 알려진 진묵대사가 17년 동안이나 머물며 중창과 함께 수도 정진했고, 근세기에 들어와서는 해암, 용성, 고암, 학명, 해안 스님 등이 수도 정진한 법 향이 가득한 곳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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