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gchoi62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사도세자 아들 정조대왕의 효심으로 중창한 龍珠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09.29 14:34
  • 19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
네이버 밴드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폴라
핀터레스트
URL 복사
용주사(龍珠寺)는 뒤주에 갇혀 고통을 겪다가 8일 만에 비명횡사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했던 왕찰(王刹)이자 정조 대왕의 원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자, 효행 근본도량이다.

용주사는 854년 신라 문성왕 16년에 염거화상이 창건 당시 갈양사(葛陽寺)였지만 이후 수많은 전란을 겪으며 부침을 거듭했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正祖)대왕이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효심을 기리는 능사(陵寺)로서 거듭난 곳이다.

정조대왕은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서 시주 8만7000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스님에게 총도감을 맡겨 4년간의 공사 끝에 회향했다. 회향식 전날 밤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정조대왕이 갈양사(葛陽寺)를 용주사(龍珠寺)로 바꿔 부르게 했다고 한다.

정조대왕은 용주사 창사(創寺)와 동시에 이곳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게 하는 한편 대왕에게 부모님의 은혜를 설법한 보경스님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했다.

용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정조대왕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영조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차에 우연히 전라남도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 보경(寶鏡)스님을 만나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설법과 함께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받고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우겠다고 발원했다.

하여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수원시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 삼았다.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기리는 사찰로 거듭났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도 "불교에서 부모의 은혜를 열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첫째가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네번째는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시는 은혜, 다섯 번째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 여섯 번째는 젖을 먹여서 기르시는 은혜, 일본 번째는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은혜, 여덟 번째는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아홉 번째는 자식을 위하여 나쁜 말과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은혜, 열 번째는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를 설법한 보경스님의 법문에 감동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같은 법문을 듣고 감동한 정조대왕은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우기로 결심,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용주사를 창건토록 했다. 이와 함께 보경스님을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과 용주사도총섭(龍珠寺都摠攝)을 겸하게 대단히 큰 규모로 공사가 진행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창건자료집 각항택일(各項擇日)과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두 자료에는 주요 공사 기간이 7개월여 정도 걸린 것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사찰의 규모나 중요성에 비해 7개월이라는 불사기간은 대단히 짧았다. 이는 창건 당시 동원된 인적 구성과 재물의 양을 통해 쉽게 알려주는 대시주진신안(大施主縉紳案)에 큰 시주를 한 96명의 고위관료들의 명단과 관직명이 수록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용주사건축시각도화주승(龍珠寺建築時各道化主僧)이라는 자료엔 용주사 창건을 위해 각 지방의 책임을 맡은 스님 명단 중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보경당 사일(寶鏡堂獅馹) 스님과 성월당철학(城月堂哲學) 스님이 큰 활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용주사의 창건과정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자료인 팔로읍진여경각궁조전시주록(八路邑鎭與京各宮曹廛施主錄)에는 제목 그대로 각 궁고 호조·병조 등의 중앙관청, 그리고 서울의 각 가게에서 전국에 이르기 까지 분야별로 시주한 내용이 실려있는데, 용주사의 창건은 가히 범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진 대역사(大役事)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대왕이 비명횡사한 아버지를 가슴에 묻어두고 본인이 용상에 오른 뒤 아버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중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 보경스님의 '부모은중경' 설법이 오늘의 용주사를 효심 대찰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건릉을 왼쪽으로 빠져나오면 불과 1.7㎞ 거리에 숲으로 둘러싸인 용주사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론 태안읍 송산리(현: 송산동)지만 융건릉을 모신 화산 뒤쪽인 북쪽 기슭이다. 조선 정조대왕 때 보경스님은 융릉의 이장지를 찾아다니는 정조를 만나기 위해 가까운 대황리에 머물며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이 너머에 능지(陵地)가 있다고 진언했다고 한다. 정조대왕도 '부모은중경' 설법에 깊이 감동을 받았고, 보경스님은 용주사 중창의 도총섭(都總攝)을 맡아 4년 만에 불사를 완성했다. 전국에서 들어온 시주가 8만냥이 넘었으며, 145칸을 갖춘 대찰의 면모였다고 한다.

불사시에 '우리나라 근세의 신필'이라 일컫는 당대의 화원 김홍도를 이곳에 머물게 하고 '부모은중경'을 그린 그림과 목판 그리고 김홍도의 감독 하에 조성된 대웅전 후불탱화는 우리나라 최초로 탱화에 서양화기법(일명 태서법이라 함)을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이 탱화를 두고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는 "조선 정조는 용주사를 창건하고 단원 김홍도에게 불전(佛殿)의 탱화를 그리게 하니, 더 이상 보충할 데가 없이 정교하여 가히 입신의 경지에 든 듯 묘(妙)하다"라고 찬탄했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